불교와 무한

2015. 12. 27. 11:33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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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불교와 무한(1)

- 유한과 무한은 같아 …‘一卽多 多卽一’-
- 순간은 영원도 내포…복제인간도 한 예 -

석가모니는 B·C. 566년에서 486년까지 생존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중생에게 헤아릴 수 없는 먼 전생의 인연을 깨닫게 하고 오늘날의 나의 깨달음이 먼 미래에까지 세계가 불국토(불교적인 좋은 세상)가 되도록 하는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 법화경>의 전생불, 미래불의 사상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이다. 그러나 전생과 후생의 인연의 얽힘 속에 무한을 산다. 불교의 대오(大悟), 유교의 안심입명(安心立命,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깨닫고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은 한결같이 유한의 인간이 무한의 생명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됨을 말한다.

아무리 미세한 곤충도 무한의 생명 연쇄 속에 하나의 고리로써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한을 의식하지 못한 채 순간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산다’는 것은 의식하는 일이다. 인간은 무한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의식하므로써 무한을 산다.

< 화엄경>에서는 대담하게 ‘인간은 태아의 입자이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태양(생명의 원천)빛의 입자와 같이 생명의 씨를 안고, 저마다 그들의 마음속에 불성(佛性)을 지닌다.
불성이란 무한을 의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의 생명을 무한 세계에 대응시킬 수 있는 지혜이다. 그러기에 악인은 없으며 중생(민중) 모두가 정진을 거듭하므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 자성을 갖춘 인간은 직관적으로 무한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18세기 신비주의 시인인 브레이크(W. Blake)도 그 사실을 깨닫고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의 꽃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의 무한은
일각에서부터 영겁(永劫)의 시간을 파악한다.


아무리 작은 한 알의 모래알도 세계의 구성 요소의 하나이다. 부분은 전체를 이루는 한 요인이다. 한 송이의 꽃을 피게 하는 인연의 고리를 다듬어 무거운 생명 의지를 느낀다. 공간적으로 손바닥이 무한 세계에 대응하고 일순간에 영겁의 시간이 대응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나타내고 있다.


‘일회(一會)에 세계가 충만하다’
‘일(一)에 무량(無量)의 세계가 있다’
‘일모공(一毛孔)에 대세계가 있다’
‘일중생(一衆生)에 광대한 여래(如來)의 지혜가 있다’
‘한순간에 영원이 내포된다’
‘일(一)에 세계해(世界海)가 들어 있다’

극미의 세계와 대우주, 한 순간과 영겁의 시간이 대응한다.
불교에는 이와 같이 얼핏 상식의 세계에서는 엉뚱하다고 생각되는 말들이 많 다. 유한과 무한의 같음은 분명히 상식에 벗어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분명 히 현대 수학의 무한 논리와 일치하고 있다.

현대 수학은 ‘무한의 과학’이라고도 한다. 현대 수학의 부분과 전체의 같 음을 말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이 사실을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로 표시한다.

불교가 마음의 무한성을 깨닫고 일찍부터 이 주제를 갖고 여러모로 씨름해 왔다면 현대 수학은 19세기말 무한의 특성이 전체와 부분이 같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 과학은 실제로 한 가지씩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내고 있다. 클로닝(cloining, 복제 인간)도 그 한 예이다. 인간의 피부 세포 하나만 있으 면, 나뭇가지를 심어 새 나무를 성장시키는 것처럼 똑같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켜보면 복제 인간의 가능성도 이미 ‘무한과 유한’의 일체성에서 감지 되어 왔던 것이다.
<13>불교와 무한(2)

불교는 무수억 인연 직관으로 파악

최근 필자는 BBC방송이 제작한 ‘식물 세계’를 보면서 수십 시간을 1초로 단축하여 식물의 성장 상태를 보여주는 화면에 큰 감명을 받았다. 넝쿨은 마치 살아 있는 문어발처럼 순간마다 뻗어 나가고 잎사귀가 돋아나자 금방 꽃이 피고 진다. 식물의 일생이 그야말로 일장춘몽으로 시작되고 끝나고 다음 세대에 이어져 있다. 제행무상(諸行無相)의 의미를 이 필림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광속도로 1억 광년에 걸치는 지름을 갖는 거대한 성운도 한 장의 우주 지도에 그려질 때는 한낱 점에 불과하다. 현대 과학의 발달은 제행무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불교 철학에서는 일찍이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여러 부처님을 공양함에 있어서 한끼(一食) 사이에 모두 무량(無量), 무수억(無數億)의 여러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다면 정각(正覺)을 얻지 못한다. <무량 수경>
여러 부처님에 대한 공양, 곧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한 수조 광년의 시간·공간의 무게를 자각하는 일이다. 그것은 잠깐의 시간(일식 사이)에 엄청난 인연에서 얽힘을 깨닫고 시간으로는 순간, 공간으로서는 점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작업이다.

이 순간 나를 에워싸고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한 인연의 얽힘은 무수억의 생명 의지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무엇으로도 이 무서운 인연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그 무게에 압도당할 것만 같다. 하지만 불자는 용기를 가지고 이 진리를 응시하며 순간마다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겠다.

지난 주 본란에서 근대 수학의 무한에 대한 이해는 “무한이란 부분과 같을 수 있는 것”이며 불교적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상통함을 설명했었다. 개념의 겉보기는 수학과 불교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수학의 무한은 유한 개념의 연장선상에 무한을 정의한다. ‘무한’이란 한마디로 막연하게 여겨 왔던 개념을 자세히 분류하고 이들 사이에 대소 관계가 있고 비교를 가능케 한 것이었다.

‘무한은 유한의 연장선상에서 정의한다’ 이 뜻은 무한의 유한화라고도 할 수 있다. 유한적인 대상은 많다 적다 등 크기의 비교가 가능하다. 가령 A라는 집합은 10명의 학생의 모임이고, B라는 집합은 9개의 책상의 모임이다. 지금 A(10명의 학생)와 B(9개의 학생) 사이에 어느 쪽이 많은 가를 보기 위해서는 학생 한 사람마다 의자에 앉게 하면 된다. 이것은 1대 1의 대응이라 한다.

이때 한 학생이 의자에 앉을 수 없을 때는 학생 수가 의자의 수보다 1개 더 많다고 한다. 1대 1의 대응이 완전히 성립하면 두 집합의 개수는 같으며 그것이 성립하지 않으면 과부족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요소를 지닌 집합들 사이의 비교도 이와같이 ‘1대 1의 대응’ 방법으로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 유한적인 비교 방법을 그대로 무한적인 대상에 적응시킴으로써 무한들 사이에 대소, 같음의 관계를 정의한 것이다.

1, 2, 3, … n, … 자연수의 집합은
2, 4, 6, … 2n, … 짝수의 집합과
1대 1의 대응이 성립하여 같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0과 1 사이에 있는 수, 가령 0.0123 …,과 같은 것의 수 집합, 일반적으로 0. a1, a2, a3, … an …의 수의 모임은 정수 전체의 집합보다 큰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와같이 무한이라고 한마디로 처리해 온 대상들 사이에도 유한 세계의 수처럼 대소 여러 종류의 수가 있다.

그러나 불교적인 무한은 이들 여러 종류의 무한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리를 파악했다. 그것은 인간이 ‘지금, 이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고속도촬영법에 묘사된 수십 년간의 나무의 성장과정이 몇 초간에 묘사될 때 그 나무의 참모습은 오직 ‘지금, 이 곳’일 수밖에 없음이 실감된다. 인간의 그 존재 양식인 무량, 무수억의 부처님의 생명 의지를 집약하고 있는 것이다.
<14>불교와 무한(3)

- 전체와 부분 같은질서 유지하는 동등한 세계 -
- 연화장 세계 안에 무한의 연화장 세계 존재 -

하나의 무한집합 속에 자신과 같은 정도의 무한집합이 정연하게 전체와 부분 서로의 질서를 깨뜨림 없이 존재한다. 간단한 1, 2, 3, …으로 구성되는 수 중에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2, 4, 6, … 2n 또는 1, 3, 5, … 2n-1과 같은 짝수, 홀수 전체의 집합이 있다. 이들은 부분으로써 전체와 같은 정도로 많은 무한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 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전체와 같아질 수 있다. 이 엄청난 무한의 이법(理法)이 공간적, 시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세존의 입 안의 이(齒)사이로부터 수없이 많은 빛이 방사되고 시방(十方)의 세계를 비치고 있다고 묘사했다. 그 빛을 받은 보살은 연화장(蓮華藏) 세계를 볼 수 있고, 그 연화장 세계에는 무한의 세계가 있고 그 하나하나의 세계에는 각각 부처가 있다. 또 하나의 연화장 세계를 중심으로 무한의 연화장 세계가 각자의 부처를 중심으로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수학에서는 가시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선분 AB의 일부분에 불과한 선분 CD속에 포함되어 있는 점의 개수는 전체 AB속에 포함되어 있는 점의 개수와 같다고 한다. 수학은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위<그림>의 직선 선분 AB에서 선분 CD를 들어 올려 그림과 같은 삼각형을 만든다. 점 P에서 CD상의 한 점(P1)을 지나 AB와 만나는 점을 P2로 한다. CD위의 점과 AB위의 점이 완전히 일대 일로 대응하는 것이다.

자연수 전체(1, 2, 3, … k …)와 짝수 전체(2, 4, 6, … 2k …)가 같은 정도로 많은 요소를 갖는다는 것은
1↔2
2↔4
3↔6
? ?
k↔2k
라는 식으로 완전히 일대 일 대응하기 때문이다.

AB의 한 부분을 지나지 않는 CD위의 한 점은 완전히 1:1 대응이 됨을 알았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과부족이 없는 같음이 증명되었다.

위 사실은 선분의 길이가 아무리 길어도, 또 아무리 짧아도 같은 정도로 무한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와 그 일부분은 같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동등한 세계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며 엄밀한 수학적 논리에도 검증된 것이다. 그뿐인가! 이보다 큰 집합이 존재하고, 이어서 얼마든지 큰 무한집합이 한없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입증되어 있으며, 엄연한 수학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모든 불토(佛土)를 부처의 일모공(一毛孔) 속에 넣어도 남음이 있다. 부처의 자비란 허공과 같이 광대하다”<화엄경>
무한세계의 무한한 확장을 말한 것이다. 무한세계에 사유의 첫발을 디딜 때, 얼핏 모순 덩어리로 보이는 그 질서에 아연실색한다. 무한세계는 부분이 전체와 같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이며, 또 ‘여하한 무한도 최대의 무한이 될 수 없다’는 인간의 현실 감각을 벗어난 세계이다

<15>불교와 무한(4)

- “수학의 대상 유한” 기독교적 사유 -
- 불교선‘전체=부분’ 무한론 인정 -

사람은 유한의 대상에 대해서 비교가 가능하고 순서를 정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처음 수학의 대상은 유한 세계에 머물고 있다.

유한만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이때까지 ‘무한(無限)’의 개념은 한마디로 질서가 없는 것, 설사 정연한 이법(理法)이 지배하고 있다 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은 오직 유한에만 생각하고 그 속에서 질서에 순종하면 된다고 믿어 온 것이다. 그러나 무한의 모습이 수시로 유한의 틈에서 엿보인다. 무한도 유한처럼 합리적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지성인간의 최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무한’이 합리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그 개념(무한이란 무엇인가?)의 파악이 가능하고, 둘째 무한과 무한 사이의 관계가 정해져야 한다. 무한이 수학(인식)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크기’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서 같은 무한, 작은 무한, 큰 무한 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유한 세계의 같음으로부터 생각하자. 두 개의 집합이 같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1대 1의 대응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과 10개와 접시 10개 사이에는 분명히 1대 1의 대응이 생긴다. 야구 시합에서 A팀과 B팀 사이에 같은 아흡 명의 선수가 출전할 때만 그 게임이 성립하는 것이다.

칸토르(G. Cantor)는 1883년 인류 사상 처음으로 무한이 수학의 대상이 된다고 선언했다. 1, 2, 3, …이라는 가장 단순한 자연수계에도 무한개의 수가 있다. 그 속에는 2, 4, 6,… 이라는 짝수만으로 성립되는 수계(數系)가 있는데, 그것 역시 무한개의 요소가 있다. 그뿐인가. 3, 6, 9, … 등의 3의 배수계, 4의 배수계 … 무한개의 무한집합이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한 자연수계 1, 2, 3, … 과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짝수계 또는 3의 배수계 사이에도 1대 1의 대응이 생긴다는 것이다.
n↔2n이란 n과 2n이 대응된다는 것이다. 결국 n과 100n의 대응이 되며 그 논리는 n에 n억(億)을 대응시킬 수도 있다.

n↔2n(n은 2n에 대응한다)
n↔3n(n은 3n에 대응한다)
?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자연수 전체는 짝수 전체와 1대 1의 대응이 되고, 3의 배수 전체와 대응되고 있다. 짝수 전체의 집합, 3배수 전체의 집합은 분명히 자연수 전체집합의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곧 ‘부분과 전체’의 같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을 절대로 유한 세계에는 없는 일이다.

유한만을 수학의 대상으로 삼아 온 사람에게는 ‘전체와 부분이 같다’란 곧 지동설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 천동설을 듣게 하는 것과 같이 놀라운 일이다. 칸토르는 이 사실을 발견하자, ‘나는 분명 보았다(증명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다’고 절규한다. 백림대학의 저명한 수학자 크로네커(L. Kuroneoker, 1823~1891)는 이 놀라운 사실을 보고 ‘신은 정수만 창조하셨다’하여 수학의 대상은 곧 유한이어야 된다고 소리쳤다.

이 난에서 전에도 유태, 기독교의 세계관이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는 만화적임을 설명한 적이 있다. 현대 수학이 개막되는 문턱에서도 무한의 문제는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그후 수학자는 ‘무한이란 부분과 같을 수 있는 것(부분과 전체가 1대 1 대응한다)’이라고 정의한다. 무한의 수학적 정의이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에서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왔다. 이 사실은 곧 불교의 사유 대상은 처음부터 무한에서 시작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기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온누리에 가득하시고

성탄의 기쁨이

슴 가슴마다 차고 넘치게 하소서

 

춥고 배고픈 이들에게는 넘쳐나는 따스한 손길로

따뜻한 성탄이되게하시고

사랑을 잃어 외로운 이에게는

당신의 사랑으로 동행하게 하소서

 

지친 영혼들은 행복을 느끼게 하시고

다른이들의 미소도 바라보게 하소서

상처입은 육체와 영혼들을 치유해주소서

 

이지구상에서 갈등과 분쟁과 전쟁은 없어지고

참 평화가 세계 만방에 머물며

태평성세를 이루게 하소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넘쳐나며

희망과 축복을 단비처럼 내려주시고

곳곳 마다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고통에서 벗어나 노래하게 하시고

낙심에서 희망으로 일어나게 하시고

어둠에서 촛불을 밝히게 하소서

 

기쁨의 캐롤과 환희의 노래가

가슴마다 울려 퍼지게 하시고

찬미하며 기도하게 하소서

 

 

 

 

 

          

 

We Wish You A Merr Christmas - E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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