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2016. 1. 2. 17: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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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 나귀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

 

1879년 11월, 경허 스님이 동학사 조실방에서 ‘여사미거 마사도래

(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한지 석 달이 지났다.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때 동은(東隱)이라는 사미승이 스님의 시봉을 들고 있었다. 

 

어느 날, 만화 스님의 제자이자 경허 스님의 사형인 학명(學明) 스님이

동은의 부친인 이 처사를 찾아갔다. 찾아간 학명 스님을 보고 이 처사가 물었다. 

“요새 동욱(경허) 대사는 뭘 하나?” 

“그저 방안에서 소처럼 앉아 있습니다.”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는가?” 

“그거야 공부를 하지 않고 공양만 받아 먹으면 소밖에 될 게 있습니까?” 

“중노릇을 그만큼 하고 겨우 대답을 그렇게 밖에 못한단 말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선리(禪理)는 모릅니다.” 


학명 스님은 당시 참선 보다는 총무 소임을 보며 사무를 보기에 바빴었다.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되는 게지.” 

동학사로 돌아 온 학명 스님은 그 이야기를 다시 동은 사미승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셨는데, 너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 이야기를 들은 동은 사미승은 경허 스님이 참선하는 바로 옆방에서

다른 사미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물었다. 

“너네들,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니?” 

“소가 되는 이치가 뭔데?” 

“글쎄, 그게 뭘까?” 

“야, 소가 돼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된단 말야.” 

동은 사미승은 커다랗게 말했다. 

 

어린 사미승의 그 말이 참선중인 경허 스님의 뒤통수를 ‘꽝’하고 때렸다.

대지가 그냥 내려앉았으며, 만물과 자신을 함께 잊고 온갖 법문의 끝없는

오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풀렸다.(경허집) 

 

경허 스님이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를 타파한 기연이다.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는 중국 위앙종의 영운지근(靈雲志勤ㆍ771~853) 선사에

게서 비롯됐다. 어느 때 한 수좌가 영운 선사에게 “불교의 대의가 무엇

입니까?”라고 묻자,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고

대답한 공안이다. 

 

경허 스님이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無穿鼻孔處)’는 말에 이 공안을 타파

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콧구멍 없는 소’가 ‘불법의 대의’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뜻일까. 

 

원래 ‘콧구멍(鼻孔)’이란 말은 인간의 마음 속에 간직한 불성(佛性)의 기미

를 의미한다.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겨날

때 코가 먼저 생기며, 오관 중에서도 콧구멍이 먼저 뚫린다고 본 데서 ‘콧

구멍’은 불성, 본분(本分), 본각(本覺)에 비유되었다. 때문에 해탈한 모습을

‘콧구멍이 아주 누긋해졌다(鼻孔累垂)’고도 표현했다.

즉 콧구멍이 인간이 본래 지닌 불성을 뜻한다면, ‘콧구멍 뚫을 데가 없는 소’란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자적인 해석일 따름이다. 

 

토굴의 꽉 막힌 벽처럼 그를 가두었던 미망의 그물이 산산조각 나면서 경허스님은

이제 당나귀와 말의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없는 ‘콧구멍 없는소’가 된 것이다.

고삐를 꾈 콧구멍이 없는 소는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다.

그 자신이 바로 바로 자유와 해탈 자체인 것이다. 경허 스님이 절집의

관례를 깨고 스스로 법명을 ‘깨달은 소’, 즉 성우(惺牛)라고 지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출처: 붓다뉴스/ 김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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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2

 

화두(공안) 가운데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공안이 있다.

 ‘아직 당나귀 일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다가왔다’는 뜻으로, 당말

(唐末)의 선승 영운지근(靈雲志勤, ?~866) 선사가 어느 납자(장경혜릉)에게

 답한 공안이다. 줄여서 ‘려사마사(驢事馬事)’라고도 하는데, 근대의 선승 

 경허선사(1846-1912)가 이 공안을 참구하다가, 어느 날 이(李)처사가 말

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爲牛無穿鼻孔)”는 말에서 홀연히 깨

닫게 되었다고 한 이후 더욱 널리 알려진 공안이다.

 

장경혜릉이 납자 시절에 영운선사를 찾아가 여쭈었다. “선사,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영운선사가 대답했다. “려사미거 마사도래”(長慶禪師,

初參靈雲.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驢事未去, 馬事到來). 

 

공안이나 화두는 풀이하지 말라고 한다. 사량 분별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안이나 화두도 언어문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속에는 어떤 의미

하는 바가 있다.

 

‘려사(驢事)’란 ‘당나귀의 일’이고 ‘마사(馬事)’란 ‘말의 일’이다. ‘미거(未去)’

는 ‘미료(未了)’로 ‘아직 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는 뜻이고, ‘도래(到來)’는

‘왔다’ ‘닥쳐왔다’는 뜻이다. 즉 ‘아직 나귀의 일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뜻인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모든 공안이 다 그러하듯 공안에는 관문이 있다. 보통은 그 관문(함정)에 걸려

오답을 정답으로 착각한다. 이 공안의 관문은 려사(驢事)와 마사(馬事)를 일

여(一如)로 보지 않고 흔히 엉뚱하게 분별하는데 있다. 


 

필자 역시 처음엔 그와 같이 해석했는데 얼마쯤 지나자 점점 아니라는 생각

이 들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意)냐”는 질문에 영운선사가 ‘이 일 저

일’ 또는 ‘번뇌가 계속 끝임 없이 온다’는 뜻으로 답했다면, 이것은 핵심을 찌

르는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사의 답어는 예리한 칼과 같아서 질문자의

병통 즉 사량 분별심을 지적하여 알아차리게 하는데 있다. 아무렇게나 답하

는 것이 아니고 정곡을 찔러서 번뇌망상과 사량 분별심을 절단시킴과 동시에,

본래심을 간파하게 하는데 있다. 그런데 앞과 같이 해석한다면 매우 진부한

답으로, 또 하나의 분별심을 첨가시키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훈고적으로 려사(驢事)와 마사(馬事)는 ‘이 일 저 일’도 뜻하지만 그보다는

‘갑을(甲乙)’ 또는 ‘피차(彼此)’를 일컬을 때 비유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

 즉 ‘피차 똑같아서(당나귀나 말이나 별 차이가 없어서) 따질 것이 없으므로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다.

 

당나귀가 하는 일(驢事)이나 말이 하는 일(馬事)이나 모두 짐을 나르는 일이다.

말은 주로 사람이 타고 다닌다든가 파발마로 쓰이고, 당나귀는 지구력이 좋기

때문에 짐을 나르는데 쓰인다. 그러나 여의치 않을 땐 말도 짐을 나르고 당나

귀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 이와 같이 둘 다 짐을 져서 나른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는 일도 같지만 생김새도 털 색깔도 같다. 다르다면 말이 당나

귀보다 몸집이 좀 클 뿐이다. 이 둘은 통통배와 여객선 차이에 지나지 않고,

‘도토리와 상수리,’ ‘한치와 오징어’의 차이이다.

 

‘여사미거 마사도래’ 또는 ‘여사(驢事)와 마사(馬事)’란 50보 100보이므로 분

별하지 말라는 뜻이다. 피(彼=여사) 차(此=마사) 똑같으므로 불이(不二) 곧 일

여(一如)로 보라는 뜻이다. 즉 불법의 대의, 선의 핵심은 사려분별을 초월한

경지, 사량 분별심을 떠난 그 자리가 곧 불법의 핵심, 요체라는 뜻이다. 분별을

떠난 세계, 무분별의 세계, 그것이 바로 ‘불법의 대의(大義)’인 동시에 ‘깨달음

의 진수’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깨닫는 것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참구하면 된다.


(출처: 금강신문/ 윤창화 도서출판 민족사 대표)

 

如來淸淨等虛空하사               無相無形徧十方하사대

而令衆會靡不見케하시니    此福光神善觀察이로다


여래는 청정하여 허공 같으사

모양 없고 형체 없이 시방에 두루 하여

여러 대중들에게 다 보게 하시니

이것은 복교광음 주수신이 잘 관찰하였네.


강설 ; 여래는 텅 비어 청정하다. 마치 허공과 같다.

그러므로 아무런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으므로 시방에 두루 하다.

누구나 다 보고 듣는다. 눈에 보이는 이 사실들이며,

귀에 들리는 이 소리들이다 

 

- 무비스님

 

 

 

아름다운것을 보면

그대 생각납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김용택 '내 사랑은'중에서 - 

 

I was entranced by the beauty

get thirsty for you

This love is.....

You are the love of my Love

 

'My love is...'by Kim yongtaek

 

 

 
 
 
한해를 열심히 달려온 님들 !!
 
지난 한해를 뒤돌아보시
부족했던 일들은
새해에 이루시기를 다집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