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담스님 법문

2016. 1. 16. 21: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728x90

 

 

송담스님(No.246)-84년(갑자년)  / 추계산철결제 법문(84.08.27)에서

 


이 법당에 계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이 ‘이뭣고?’,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생각을 합니다마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다못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무조건하고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다가 그걸로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분석해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여.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 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그래서 옛날에 이 공부는 ‘무얼 많이 알고 배우고 허면은 오히려 이 공부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경을 알고, 학교를 많이 다니고 해서 지식이 풍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기에다가 끌어들여서 그것을 동원하지만 아니하면, 뭐 하등(何等)의 해로울 것도 없지만,
중생의 습기(習氣)라 하는 것이 그렇기가 어려워서 뭘 많이 알면 아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놈을 갖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그놈으로 이리저리 분석도 허고,

적용도 해보고, 종합도 해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보고도 싶고 이럴 수가 있어서 허는 말이지,

꼭 많이 알면 못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는 큰 신심(信心).
‘내가 본래 부처다. 나도 부처님이다. 그러니 어찌 내라고 해서 이 공부를 못헐 것이 있는가?

나도 열심히 허면 결정코 성불을 헐 수 있다’고 허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태산(泰山)을 끼고 바다를 건너뛸려고 허는 것은 헐 수가 없는 일이여,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하는 바로 거기에 나의 본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라,
‘올바른 방법으로 참구(參究)만 허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분심(憤心)을 가져야 하는데,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와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결판을 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고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육도 속에서 이렇게 윤회(輪廻)를 허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을 가져야 해.

분심을 가져야 용맹심이 나고, 용맹심을 내야 퇴타(退墮)를 안하게 되는 것이여.

분심이 없고 용맹심이 없으면 공부에 아무 매카리가 없어 가지고,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공부를 허는 것인지 안 허는 것인지,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여간해서 이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달(了達)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손수 머리를 깎어 버리고

6년, 어떤 경전에는 12년이라고 되어있는 데도 있습니다마는, 그 무서운 고행을 하셨고,
달마(達摩) 대사도 소림굴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셨고,

장경(長慶) 스님이라 하는 분은 포단(蒲團)을, 방석을 7개를 뚫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좌선을 지극정성으로 했으면, 궁뎅이로 방석이 뚫어져서 못 쓰게 되면

또 다른 방석을 가지고 또 정진을 하고, 1년 이태 이렇게 한 방석을 가지고 한결같이

앉아서 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허다 보니까

멀쩡한 방석이 닳고 닳아서 구녁이 뚫어져. 이렇게 하기를 7개 포단을 뚫었다 이거여.

향림(香林)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어.

타성일편이라 하는 것은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그 40년에사 타성을 일편(打成一片)했다 그거여.

조주(趙州) 스님은 소년 시절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견성(見性)을 한

그러헌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고 헐 만큼 그런 큰스님인데,

3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했어. 잡되게 마음을 쓰지를 안 했다.

이 공부는 이만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지만,

이만한 끈기와 정성과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조금 해보고 ‘아이고, 그놈의 것 못 해먹을 지서리다’, ‘인연이 없나 보다’,

‘내가 근기가 약한가 보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하루해가 넘으면 ‘오늘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하루해가 넘어갔구나’

이래가지고 발을 뻗고 통곡을 헌 스님도 있다고 합니다.
밤에 잘 때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깨면서 정진을 헌 그런

스님도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지고서 지리산을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밤새 다니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그 돌이 지금 지리산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앞에 그 돌이 지금도 놓여 있습니다마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아니 된다고

허는 것은 충분히 우리는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일찌감치 그만두고 아미타불(阿彌陀佛) 10번만

불러도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데, 우리 같은 여자가, 더군다나 속가에 있으면서

그 참선은 감히 생각지도 못헐 일이다.
그저 염불(念佛)이나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가야겠다.’
혹 그렇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분이 있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려운 면으로

보자면 그렇고,쉬운 면으로 보자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다' 그랬어.

세수를 허다 보면 코를 만지지 않을랴고 해도 저절로 코가 만져지는 것이여.

내가 나를 찾는 공부가 쉽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밥 먹을 때, 옷 입을 때, 걸어갈 때, 말헐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거든.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찾을랴고 함으로 해서 달아나버리고 놓쳐버리는 것이지,

찾을랴고 허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에 있거든.

그러니 그것이 쉽다고 헐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찾을랴고 허면, 이렇게 시청언동(示聽言動)-눈, 코, 입, 귀를 통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말하고, 바로 거기에 있건마는,과연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놈이 무엇인가?’하고

찾어 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이렇게 눈을 통해서 온갖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듣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다 가려내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그렇게

판별헐 줄 아는,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잠시도 나와 더불어 1분 1초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건마는,

그렇게 소소영령하고 분명한데 아! 찾어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그러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찾어도 볼 수가 없고, 1분 1초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이 노상 같이 있고, 가깝기로 말하면 한 걸음도 여의지 않고 1초도 여의지 않는 것이고,
멀기로 말하면은 삼천대천세계를 찾어도 없으니 이 기기(奇奇)하고 묘묘(妙妙)한 이 도리를

어떻게 말로 가르켜주고 생각으로 알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헌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화두(話頭).

‘이 무엇고~?’
말을 할 때에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배가 고플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해 갈수록 꽉 막혔어.

앞도 없고 뒤도 없어.  ‘이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처음에는 입으로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금방 딴 생각이 일어나고,앉았을 때 ‘이뭣고?’했는데 일어서다가 잊어버리고,

금방 ‘이뭣고?’허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은 그 소리 듣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말이여.

보다가 잊어버리고, 듣다가 잊어버리고, 냄새 맡다가 잊어버리고, 먹다가 잊어버리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린 것 걱정허지 말고, 딴 번뇌·망상 일어나는 것도 걱정허지 말고,

그저 부지런히 챙기기만 하면 되는 거여. ‘이뭣고~?’

경(經) 공부를 한다든지 다른 무슨 공부를 허면 무엇이 알아진 것도 있고, 하루 하면

하루 한만큼 무엇이 얻어진 바가 있고, 이틀 허면 이틀 헌만큼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진 바가 있는데,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허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헌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무엇이 환하니 보이고,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여진 것이 있으면 그건 공부가 잘못 되어간 거여.

스승 없이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허면 백이면 백, 다 잘못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느 불효자(의사)의 때늦은 후회 


지금도 시장길을 지날때면 시장구석진 자리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곤 한다.
예전에는 이 시장길을 지나는 것이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에게 이곳을 지날 여유도 없다.
어쩌다 가끔씩 들려보는 이곳 시장터.
난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한분의 고귀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엄마 시장갔다 올테니, 밥 꼭 챙겨먹고 학교가거라"

난 장사를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잠을 자는 척 했다.
이 지겨운 가난. 항상 난 이 가난을 증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벗어나고 말리라는 다짐을 굳히곤 했다.
내가 학교가는길 시장 저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어머니가 나를 발견할까봐 얼른 도망친다.


우리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다고 한다.
일하는 도중 철근에 깔리신 어머니를 구하시려다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일을 가시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나물을 캐서 팔곤 하셨다.
난 항상 들판에 절뚝거리시며 나가시는 어머니가 싫었고
밤새 나물을 다듬으시는 모습도 싫었다.

더더군다나 시장 한귀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 비슷하게
장사를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퉁퉁부은 다리한쪽을 주무르시며
나물을 다듬고 계신다.

나를 보자 어머니는 기쁜 낯으로 3,000원을 주신다.
난 그돈을 보자 화가 치민다.
"난 거지 자식이 아니란 말이야 이런돈 필요없어!"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버린다. 
  


다음날 아침 난 어머니가 시장 간 틈을 타
집에가서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간다.
학교길 약수터에서 간단히 세수를 한 다음 물로 배를채운다.
난 비록 풍요롭게 먹고 입지는 못했지만 공부는 악착같이 했다.
그래서 부잣집 자식들보다 공부는 항상 잘했다.
하지만 그자식들에게 사는 미움도 만만치않았다.
그날 4교시가 끝날무렵 아이들이 갑자기 웅성거린다.
복도를 보니 어머니가 절뚝거리시며 교실로 들어선다.
선생님 드리려고 장사하려고 다듬은 나물을 한봉다리 들고서...
어머니는 내가 어제 들어오지 않자
걱정이 되셔서 학교에 오신거란다.

선생님과의 면담을 끝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이들이 한마디씩한다.
"야! 이민석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그놈은 그잘난 부잣집 아들 현우였다.
현우는 어머니의 걸음걸이를 따라한다.
무엇이 우스운지 반 아이들은 웃어댄다.
난 화가 나서 그놈을 정신없이 두들겨 줬다.
그리고서는 교실을 나와 버렸다.


저녁무렵 집에 가니 집앞에
잘차려 입은 여자와 현우가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 내는거야 뭐야. 자식 교육좀 잘시켜,
어디감히 우리집 귀한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응.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어머니는 시종일관 죄송하다는 말뿐이다.
난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다.


집에 들어가도 어머니는 아무말씀 없으시다.
난 어머니에게 한마디한다.
"다시는 학교에 오지마 알았어? 챙피해서 죽는줄 알았단 말이야."
"그래 미안하다 난 민석이가 걱정이 되어서......"
"난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
난 해서는 안될말을 해버렸다.
슬픔을 보이시는 어머니를 못본척하며 자는 척 했다.
"난 꼭 성공할꺼야."
밤새 이렇게 외쳤다.
다음날 아침 수업료라며 엄마가 돈을 쥐어 주신다.
얼마나 가지고 계셨는지 너무도 꼬깃하고 지져분한 돈이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부르신다.
적어도 선생님만은 내편이셨다.
어머니께 잘 해드리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신다.
선생님께서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어머니께 전해 달란다.

난 그러마 했다.
하교 길에 길 모퉁이 배추가게 쓰레기통에서
배추잎들을 주어모으시는 어머니를 본다.
난 모른척 얼른 집에 들어와 버렸다.
그날 저녁 배추국이 밥상에 올라온다.
"이 배추!"
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께선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배추가게 아저씨가
팔다 남은거라고 버리기 아까우니 가져가서
민석이 국 끓여 주라고 하더구나"
어머니의 말에 난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난 거지자식이 되어버린것만 같았다.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 어머니가 너무도 싫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이 어머니 생신이셨다고 한다.


   


ㅡㅡㅡ그후~17년후ㅡㅡㅡ


난 의사가 되었다.
가정도 꾸리고 병원도 장모님께서 개업해 주셨다.
난 너무도 풍요로운 생활에 어머니를 잊고 살았다.
돈은 꼬박꼬박 어머니께 보내 드렸지만 찾아가 본적은 없었다.
아니 어머니라는 존재를 잊고 살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 옳을지 모르겠다.


그런 어느날.....
퇴근길에 우리집 앞에 어느 한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걸 봤다.
다가서니 그노인은 내가 가장 잊고자하는 어머니였다.
전보다 더 야윈얼굴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여전히 절뚝거리는 다리......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신다.
"민석아 많이 좋아졌구나."
난 어이 없다는듯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난 차갑게 한마디 한다.

뭐가 모자라서 나에게 온단 말인가...
그동안 생활비로도 모자라단 말인가?
민...석....아....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
"전 민석이가 아니라 최영호입니다."
난 이 한마디를 끝으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정부가 애써 돌려 보낸후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있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후 한달동안 난 악몽에 시달린다.


할수없이 난 다시는 되돌아 가기 싫은
시장이 있는 우리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시장 한귀퉁이에 여전히 나물을 팔며
기침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가만히 곁에 가서 지켜본다.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묻는다.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
"아니여. 우리 아들이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만.
우리 아들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어머니는 자식자랑에 기분이 좋았는지
나물을 많이도 넣어 드린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난 예전의 집으로 향한다.
아직도 변한게 없는 우리집
거의 쓰러져 가는데도 용케 버티고 있었다.
이런곳에서 살았다는게 생각에 없을 정도였다.
난 방틈으로 돈봉투를 넣어놓고는 돌아선다.
1년이 지난후 난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고교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래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발길은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시장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정말로 보이질 않았다.
도착한 곳에는 선생님이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신 선생님 아무말씀도 없으시다.
무거운 침묵.......
"민석아 내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셨다.
선생님께선 낯익은 보따리를 나에게 주신다.
바로 어머니가 가지고 다니시던 나물보따리셨다.
이 보따리에다 밤새 다듬은 나물들을 싸서
시장에 팔러 가시곤하셨다.
"풀러 보거라"
선생님의 말씀대로 난 보따리를 풀렀다.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동안 네가 돌아올까봐서 그리고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수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렸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하셨다.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 동무가 되어드렸단다.
그래서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선생님의 얘기들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생님의 얘기는 이러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적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은
퇴근길에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자식이 없던 터라 나를 데리고가서 키웠다고 한다.
늦게 얻은 자식이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한다.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둘수 없어
항상 나를 공사판에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 어느날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뛰어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와 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다고 한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난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로 살아난
운좋은 놈이라고 한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 다리마져 불편하신 어머니께
주위사람들은 나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어머닌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이 여기셨기에
나를 버리시지않고 키우셨다고 한다.
그후 어머닌 아버지를 잊기위해 이곳으로 옮기셔서
나물을 팔며 나를 키워오신거란다.


내가 대학다닐때 암인걸 아신 어머니는 자신의 몸보다
내 학비를 마련하기위해 병원에도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암 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내가
내 어머니를 암으로 돌아가시게 하다니....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보고자
물어물어 서울까지 오셨다고 한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아닌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이 여기셨던
어머니를 버린 나 자신을 용서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조용히 내려보시는
어머니의 사진이 잔잔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이런 자식마져도 어머니는 사랑하시나 보다.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그후 난 시간이 날때마다 가끔씩 이곳을 들른다.
혹시나 어머니가 나물을 파시고 계실것 같은 착각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