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야샨티의 <참된 명상 True Meditation>

2016. 3. 6. 16: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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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야샨티의 <참된 명상 True Meditation> 가운데서

우리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깨닫기 전에,


먼저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근거 없는 가정들이 탐구 과정 전체에 계속해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뺄셈의 길’이라 부를 수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비아 네가티바(Via Negativa)’, 즉 ‘부정의 길’


이라고 불렀다. 힌두교 전통의 베단타(Vedanta)에서는 이것을


‘네티-네티(Neti-neti)’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라는 뜻이다. 이것들은 모두 뺄셈의 길이며, 우리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방법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라고 하는 가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길은 이런


가정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수많은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가정들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고는 생각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있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분명히 있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를 수 있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은 안다.


생각들은 오고 가지만, 그 생각들을 목격하는 그것은 늘 그대로 있다.

만약 생각들이 오고 간다면, 그것들은 정말 당신 자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들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라는 생각을 실제 자기 자신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자신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자기의 경험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당신은 자기의 생각들을 보는


목격자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하든지 간에 그런 생각들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생각들을 보고 있는 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느낌들이 있다. 우리 모두는 행복, 슬픔, 근심, 기쁨,


평화와 같은 감정적인 느낌들을 경험한다. 우리는 몸에서 느낌들을 경험하는데,


그것들은 여기서는 수축되고 저기서는 열려 있는 에너지의 느낌일 수도 있고,


그저 발가락에서 느껴지는 가려움일 수도 있다.


몸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느낌들이 있고, 그러한 느낌들을 보는 목격자가 있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느낌을 보거나 알아차리고 있는 어떤 무엇이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느낌들이 있고, 느낌들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다.


느낌들은 오고 가지만, 느낌들에 대한 알아차림은 늘 그대로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은 어느 하나도 부정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의 가장


깊고 진실한 정체성은 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느낌은 우리의 정체성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느낌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느낌들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믿음들이 많이 있고,


그런 믿음들에 대한 알아차림도 있다. 그것들은 영적인 믿음들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에 대한 믿음들일 수도 있고, 부모에 대한 믿음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들(대개는 가장 해로운 것이다)일 수도 있으며, 온갖 잡다한 것들에


대한 믿음들일 수도 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생각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들은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인생을 경험함에 따라 변해


왔음을 우리 모두는 알 수 있다. 믿음들은 오고 가지만, 믿음들에 대한


알아차림은 믿음 이전에도 언제나 있다. 알아차림이 더 근본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들은 우리 자신일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쉽게 알 수 있다.


믿음들은 우리가 목격하는 어떤 것, 우리가 보는 어떤 것, 우리가 알아차리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믿음들은 우리에게 목격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자가 누구인지를 얘기해 주지 않는다.


보는 자 또는 알아차리는 자, 목격자는 믿음 이전에 있다.

우리의 에고-개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에고가 있고, 개성이 있다. 우리는 대개 각자의 에고가 우리


자신이며, 각자의 개성이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들, 느낌들,


믿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에고-개성을 보는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당신’이라고 불리는 에고-개성이 있고, 에고-개성을 보는 무엇, 에고-개성을


알아차리는 무엇이 있다. 에고-개성에 대한 알아차림은 개성 이전에 늘 있다.


알아차림은 판단 없이, 비난 없이, 개성을 알아차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밀접한 어떤 것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의 에고나 개성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개성이 있고, 개성을 보는


목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의 본질적인, 가장 깊은


본성은 당신의 개성일 리가 없다. 당신의 에고-개성은 더 근원적인


어떤 것에 의해 목격되고 있다. 그것은 알아차림에 의해 목격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알아차림 자체에 도달한다. 우리는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사람에게 알아차림이 있다.


만약 당신이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실제로 이 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알아차림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생각을 알아차린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하는 느낌을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명백히


현존한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함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존재한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게 하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알아차림이다.


- 몽지님



 

 

3월에 / 이해인

단발머리 소녀가
웃으며 건네준 한 장의 꽃봉투

새봄의 봉투를 열면
그 애의 눈빛처럼
가슴으로 쏟아져오는 소망의 씨앗들

가을에 만날
한 송이 꽃과의 약속을 위해
따뜻한 두 손으로 흙을 만지는 3월

나는 누군가를 흔드는
새벽바람이고 싶다

시들지 않는 언어를 그의 가슴에 꽂는
연두색 바람이고 싶다-

 

 

 


어느날 백련암에 신도가 찾아와

성철스님께 물었다.


“팔자가 기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신도의 얼굴을 똑바로 보시고 말했다.

“변한다. 모두 변한다.
참회를 하면

몸의 병,

마음의 병,

업의 병

모두 다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