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은 弟子를 알아보지만 弟子는 스승을 못 알아 봐! /현웅스님

2016. 4. 17. 17: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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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스님



 

스승은 弟子를 알아보지만 弟子는 스승을 못 알아 봐!

< 주간 불교연재글>


 

1. 예수와 베드로,  보리達磨와 혜가

 

사람이 바꿔지려면 내 마음에서 새로워져야 하는데 내 마음이 새로워지면

사회도 새롭고 만나는 사람도 새롭고 새해도 새롭다.

그러나  내가 안 바꿔지고 밖에만 바꿔지면 나는 날마다 지루하다.

내가 바꿔지려면 내 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성품을 봐야한다



마음은 빈 성품에 붙어 있는 구름이다.
빈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은 떠 댕긴다.

성품을 본 사람은 오온을 그렇게 본다.  번뇌 또한 그렇다.
이 사람은 변해져 있는 사람이다.

성인은 사람 속에 구름이 없는 빈 성품을 보고 나온 분이다. 


예수가 말하는 “나는 길이요”란 구름을 헤치고 나와 푸른 하늘에 닿아있는 것을 말함이요.

“진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빈 하늘을 말한다.


“빛은 ”구름을 벗어난 곳에서 아래를 내어다 보는 지혜이다.

그리고 가난한 마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다.


 禪은 장애 없이  뚫어져 있는 길을 “향상일구” 라고 하고 화두 중에 

이 하나의 뜻을 품고 있는 一句가 이 무었고! 가 그것이다.
언어에 묶임을 벗어나 一句를 터득하면 모든 성인의 뜻을 이곳에서 만난다.


경에 “ 이 一句 곧 法性을 본 사람은 ‘3세 일체 불을 본다" 가 그것이다.

향상일구는 주장자를 든 선사만이 쓰는 언어가 아니다. 
높은 하늘에 올라가 있는 독수리에게는 구름이 발아래 이다.
내 본성을 안 가린 세계가 그것이다.


마치 언어에 붙들리면 옛 주공 apt를 요즈음 L H home 이라고 하듯 같은 건물에 이름만 다르다.

 禪心을 얻는 者에게는 言語가 그 사람을 못 속인다.

 

성인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믿는 종교는 미혹으로 둘러 씌어져 있고

사람 사이에 벽만 두껍게 하고 어둡다. 예수가 말한다.
' 너희는 지금 나의 제자이지만 깨달아 미혹이 걷히는 날 너는 나의 형제이다.'

라고 말한 것도 그것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는 그 안에 있는 진리의 性品을 먼저 보고 나온 사람이다.
 티베트 고승들이 전한 바에 의하면   예수는 30세 전 젊은 시절 인도에서

어느 스승아래 공부 한다. 어느 날 그에게 깨침이 온 뒤 고향을 방문하고 싶다. 라는 말을

스승에게 한다.
 그러나 스승은 아직 때가 이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고향 이스라엘을 찾아 나섰다.


그는 모세의 율법이 몸에 밴 유대인들과 3년간 심한 갈등을 만난다.

그의 전법 활동은 갖은 모함에 부딪치다 시대가 주는 희생물로 젊은 생을 마감한다.

 예수의 고난을 보면 마치 인도에서 중국에 온 보리 달마를 보는 것 같다. 


 달마의 스승 반야다라는 달마를 중국으로 보내기 전 중국에는 이미 노자나 공자 같은

인물들이 남기고 간 도덕경이나 중용 속에 도의 흔적을 보고 보낸 것이다.

다만 흔적은 있지만 깨친 사람이 없었다. 스승은 그것을 알고 제자 달마를 중국에 보낸다.
 그의 전법의 길 또한 많은 시련을 만난다.


처음에 달마는 경을 講의 하던 神光 法師를 만나 묻는다.
  "당신은 여기에서 무엇을 합니까?" 신광은 말한다.
"나는 경을 강의하고 있소." 달마가 또 묻는다.

 "경을 강의해서 무엇 합니까?" 신광은 "생사를 마치기 위해서라고" 答한다.


"법은 본래 말할 수 없으며, 말할 만한 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강의하는 경에서

검은 것은 글자이며, 흰 것은 종이인데, 어떻게 생사를 마칠 수 있겠습니까?"
신광 법사는 크게 노한다.


"당신, 이 나찰 鬼 같은 사람아! 감히 불법승 三寶를 비방하다니,

어찌 이럴 수 가 있는가!“ 라고 소리를 치고 신광의 손에든 쇠 알로 만든 염주로

달마의 뺨을 후려쳐 버린다.  달마는 이렇게 험한 시련을 맛본다.

 

 뺨을 맞은 達磨는 이빨이 부러지고 피가 나왔다. 
옛 문화 속에 성인의 몸에서 피가 나온다든가 이빨이 빠지면 그 지역이 삼년간

비가 안 온다는 설이 있었다.
 부러진 이빨을 밖에 뱉어 내지 않고 보리달마는 중생을 위해서 먹어버렸다고 한다.
날이 저물어 밤이 되자 神光의 꿈에 지옥문이 뵈고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달마를 찾아 참회를 않고는 잠시를 견뎌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마침내 달마를 찾는다.  굴 앞에서  한 팔을 끊어 바치고 참 믿음을 보인다.


 神光을 만난 達磨는 그에게 제일 먼저 그의 性을 보게 한다.

신광은 언어 속에 묻힌 중구에 있는 道의 언어를 다시 살려낸다.


동쪽에 보리달마는 초조가 되고 신광이 2대가 된 祖師, 慧可 가 그 분이다.
 어디서나 사람 속에 성을 보지 못하고 미리 익힌 눈은 눈앞에 있는 성인을

앞에 놔두고 알아보지 못한다.
중국인들 또한 처음에는 그의 법이 석가 부촉 법 제28대 조사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중국인들 속에서 눈 뜨고 나온 제자가 나온 뒤  족보는 이어진다.


 예수는 그런 제자를 못 만난다. 베드로가 있었지만 그의 지혜를 가려 버린 어둠은 

그의 깨달음의 눈을 덮고 있었다. 


 “주여 어디든지 따르겠습니다.”베드로의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의 어둠을 꽤 뚫어 보고 있었다.

너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등질 것이다.


 새벽은 어두운 캄캄한 밤이 물러간 시간이다. 그리고 밝음이 온다.

베드로에게 새벽이 오기엔 아직 어둡다. 그의 걷히지 않는 탐 진치가 곧 그의 어둠이다. 

지혜가 열리면 새벽이 온다. 이 말을 못 알아듣는 베드로는 주를 등진 것이 된다.

그래서 예수는  족보를 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곳에서도 그의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세례 요한에게 “ 세례를 받고 싶다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요한은 놀란다. “제가 어떻게 주님께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한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 불교 사섭법에 있는 수순중생을 예수가 행하고 있다. 

사람의 수준을 맞춰가면서 진리를 펴는 법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율법이 주는 어둠은 그에게 너무 무거웠다.  이것을 예수는

주여 !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하고 “몸을 놔두고 보는 언어” 로 마지막 열반 송을 남긴다.
만약 모세 율법 속에 있던 예수가 감히 인도에서 법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면

더 일찍 충돌을 만나는 것은 불 보듯 했을 것이다.

 

 달마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때를 기다렸다. 3년은 예수에게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예수는 사람을 못 만난 것이다.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많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가신분이다.
 선은 곧 내 안에 있는 부처의 성품을 보는 공부이다. 그 성품이 성인이 지닌 성품이다.

성품을 본 사람은 성경 논어 도덕경이 이 성품을 떠나 있지 않는 것을 본다.


진리를 나타낸 이름과 나라마다 문화는 다르지만 사람 속에 뚫려 있는 그 성품은

다르지 않다. 진리는 이곳에는 있고 저곳에는 없고 그런 어떤 언어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누가 福音과  無 字화두

 

 바리세인(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임 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의 안에 있느니라. “  누가 복음 17장에 있는 말이다.

 

 예수가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진리는 존재하지만 형상이 없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상이 없는 것이므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숭상하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이것을 금강경은 ‘32상을 여래라고 하면 여래가 아니다’ 라고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에게 있는 몸이 가린 것이 아니요

또한 마음이 가린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禪 공부 화두 중에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또한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 觀을 지나 성품을 본다. 

 

 아무것도 가린 것이 없는 성은 너와 나 사이에 벽이 없다. 하나는 그런 것이다.
이 하나는 성인과 중생에게 뚫어있다. 그렇지만 이 하나는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볼 수 없다.

우리가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른 것을 안다. 이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쉽다.

이 경험은 누구는 하고 누구는 못하고가 없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아는 존재!  우리는 이것을 神만이 아는 일이라고 한다.

 

 예수가 말하는 볼 수 없게 임한다고 한 것은 그것이다.

배고픈 이가 밥을 먹으면 배부른 줄을 안다. 이 아는 것은 나에게 찰나의 시간을

주지 않고 모르게 온다. 바리세인들은 예수의 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모세로부터 온 율법에 덮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유일신은 사람 밖에서 온다.  예수는 말한다 

'하나님은 너 안에 있다.'  이 작은 것이 가린 것 때문에 예수는 가는 곳마다 낭패를 만난다.


 그가 말한 ‘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이 말 또한 정해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하나 ” 는 禪에서 많이 보여주고 금강경에

‘무위정법이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란 경구에도 잘 드러나 있다.
 가려진 것만 다를 뿐 어디든지 두루두루 다 있다.


 성품을 봐 집착된 언어의 구름만 벗겨지면 우린 서로 다르지 않는 하나를 만난다. 

이것이 성품이고 저쪽 언어로는 神이 살고 있는 性이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 안에 있느니라’
 너를 안 떠났다는 말이다.


 앉고 서고보고 듣고 착의 긱반 하고 남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소소 영영하게 한 물건으로 있다. 이 性을 보면 禪의 곳곳에 예수의 메시지가 널려져 있다. 

사람이 자기 성품을 가린 것이 성인의 말을 스스로 멀게 한다.


 이 神性을 바리세인들이 못 알아들을 뿐 그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이 말은 조주의 대답에서도 친절하게 보여준다.


 어떤 僧이 묻는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는 無! 하고 답한다.


  이 僧 또한  ‘있다 없다’에만 관심이 가있는 사람이다.

집착 속에 있는 사람은 불성을 그렇게 알고 묻는다. 

 이 묻는 僧은 바리세인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품을 봐 깨달은 사람은 있지만

있다고 말 할 수 없고 없지만 없다고 말을 못한다. 僧은 못 알아듣는다. 

조주의 무는 있고 없음에 상관하지 않는 無이다. 

불성엔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런 것이 없다. 이 또한 경험의 눈을 필요로 한다.


 조주는 無 字로 부처의 성품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화두 하나를 관통하면

일체 성인을 뜻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마조 스님은  일원상을 그려놓고 '들어가도 때리고 안 들어가도 때릴 것이다' 라 한다. 

곧 “入也打 不入也”打가 그것이다. 


 진리는 존재하지만 답을 잘해도 얻어맞고 답을 못해도 얻어맞는다.

 예수는 진리의 성품을 경험하고 나온 분이다.
다만 “여기 있고 저기 있다 못하리니”  라고 말할 뿐이다.

경험은 언어 이전이다. 뜻은 경험 속에 살고 있다.


근세에 경봉스님과 전강 스님의 문답에서도 이를 보여주고 있다. 

통도사에서 경봉스님이 공부하고 있던 중 그에게 깨달음이 왔다.

그에게 온 경험이 너무 강열한 나머지 거침없는 언어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산중 스님들은 놀란다. 마치 그때 행각승인 젊은 선지식 전강이 통도사를 지나가고 있었다.

통도사 대중 스님들은 전강에게 발  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에게 점검을 부탁한다.

전강은 마조의 일원상을 경봉 앞에 그려 놓고 역시‘入也打 不入也打’를  말해 보시오.


 경봉은  즉시 원상을 지웠다. 
 전강은 “죽었다. 송장이니 묻어라! ” 고 한다. 

이를 禪門에서는 단멸 상에 떨어졌다고 해서 금하는 것이다.


 경봉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음의 경험이 너무 강열한 나머지 

‘이런 것도 나에겐 없어!’ 라고 말한 것이다. 말로만 봐서는 경봉은 단멸 상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은 가끔 알고도 범하는 잘못을 남긴다. 그에겐 아주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두 스님은 산행을 하며 오가는 대화를 나눈다.  경봉은 전강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한 일이 있다고 한다.  경봉과 전강은 서로가 하나에서 만난 것을 보여준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 ’  너 안에 있는 신을 만나면 말은 다르지만

뜻은 하나를 들고 나온다.  깨달은 자의 언어는 그렇다.

 

율법에 눈이 가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밖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너 안에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 낯설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놔두고 밖을 찾아나가면

그것이 우상을 짓고 안에 있다고만 고집해도 이 또한 빈 성품을 가린다.

양쪽을 놔두는 곳에 묶이지 않는 하나만 드러난다. 그것이 넓은 길이다. 

사람이 만든 벽이 무너지면 종교가 서로 가깝다. 성인은 이 길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이곳엔 고금이 없다.  얻으면 누구나 하나를 만난다.


 종교 속에 가린 것이 없으면 너와  나가 이웃이 된다.  가까운 형제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禪門에서 쓰는 ‘ 한번 일러라!  에 주어지는 답이다.

다만  그쪽에는 그런 문화가 없는 것뿐이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은 너 안에 있느니라! ’
 곧 내가 앉고, 서고, 보고, 듣고 , 착의끽반 , 많은 다른 사람과 말하는 중에

버젓이 있다는 것이다. 

안 떠났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형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 하나만  발라도  헛고생을 덜 한다. 神은 性品에 거주하고 있는 슬기로움이다.
내게 가린 性이 드러나면  세상이 새롭다. 그리고 밝다.



 禪은 이런 메시지를 품고 있는 공부이다. 

 

 

                                                                                                           - 우하성님 제공

 

 

 

이것이 무엇인가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어난 적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이것이 있었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도 이것이 있고
생각이 사라지고 나도 이것은 남아 있습니다.

느낌이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타난 적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느낌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이것이 있었고
느낌을 느끼고 있을 때도 이것이 있고
느낌이 사라지고 나도 이것은 남아 있습니다.

눈을 뜨면 보이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볼 때나 안 볼 때나 이것이 있습니다.
이것 안에서 본다고도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들을 때나 안 들을 때나 이것이 있습니다.
이것 안에서 듣는다고도 하고 듣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 몽지님


 

우리 인생은
b(birth)탄생에서 시작되어서 d(death)죽음로 끝나지만..

그 중간에 중요한 단어 바로 c(choice)선택이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에
선택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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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 찬탄 찬양 찬미하라

 

매 순간순간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지금 매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마주치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을 찬양하고 찬미하고 찬탄하고 감사하라. 

慧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