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으로 보라

2016. 5. 8. 21: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지금 이 순간으로 보라



지금 이 순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현재로 보아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로 볼 때
무분별로 볼 수 있고,
현재로 볼 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현재로 볼 때
보다 존재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으며,
근원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볼 때
현재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과거의 경험이며, 배워 익힌 것들로써
삐뚫어진 모습의 현재를 재어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를테면 여기 ‘목탁’이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을 보며 ‘목탁이다’ ‘나무다’ 라고 이름짓기를 시작하고,
한 층 나아가 ‘호감가는 것’ ‘싫은 것’이라고 느낌을 개입하기 시작한다면
우린 목탁을 현재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본질로써 다가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탁이다’라고 하면
벌써 그것은 과거에 배워 익힌 것이고
경험을 통해 안 것을 끄집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나무’라는 것도
한 단계 이름짓는 분별을 벗겨냈을 뿐
여전히 현재로써 온전히 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 친구들, 직장 동료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벌써 과거로 그 사람을 보게 됩니다.

과거에 나를 욕하고 때린 사람,
나와 의견이 잘 안 맞는 사람,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등등
과거로부터 온 수많은 그 사람에 대한 분별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과거로 보는 것이지
현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로 본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를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는 환상에 불과하고 신기루이며 꿈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를 현재로 보지 못하고
과거로써 현재를 보게 되면
우린 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
그 존재의 근원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될 뿐입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행한 그 어떤 잘잘못이나 선행을 가지고
지금 그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으로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로 보게 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일수도 있고,
나에게 욕한 사람이기도 하고, 칭찬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
온갖 분별로써 그 사람을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재로써 본다면
그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무차별의 평등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분별도 짓지 않고
그저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랬을 때
우린 그 사람을, 또 그 사물을 온전히 보는 것이고,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는 것입니다.

늘상 바라보던 대로,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늘상 과거의 기억 대로 미운 사람, 사기꾼으로만
상대방을 바라보게 되면
내 마음 속에서도 ‘미운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도 스스로 ‘미운 사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과거로 인해 시작된 분별을 놓아버리고
지금 이 순간 텅 빈 마음으로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상대방도 지금 당장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한
현재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잣대를 다 놓아버리고
텅 비어 평등한 무분별의 시선으로 보아야
그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고, 나 또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이 미래에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이익을 줄까를 생각하고 만난다면
그것은 미래로 보는 것이지 현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을 때 우린 그 사람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다만 현재로써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그 어떤 분별도 붙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나는 한 사람(사람이라는 것도 분별이지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사람, 미운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
도움될 사람, 도움 안 될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만날 때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로 만날 수 있다면
우린 그 존재를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볼 때에도
그 어떤 사람을 만날 때라도
현재로써 볼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우린 나무를, 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투영된 색안경을 끼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판단이나 기억, 분별도 다 놓아버린
평화로운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우주 법계 전체를 볼 수도 있고,
한 사람을 보면서
부처님의 모습을 만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 한 순간 만이라도
현재로써 세상 만물을 보도록 해 보세요.
물론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반면 너무나도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항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저 우린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있는 그대로’ ‘현재로써’보는 것이 더 쉬운 일이지요.
그냥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더 쉽지,
우리들처럼 ‘있는 그대로를 과거나 미래의 잣대로써 왜곡하여 보는 것’이 더 쉽겠어요?

아무런 이름도 짓지 말고,
아무런 분별도 하지 말고,
아무런 과거의 연상작용도 가지지 말고,
아무런 미래의 기대도 가지지 말고,
기존의 지식이나 상식, 경험들일랑 다 불살라 버리고
오직 지금 이 순간 그냥 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의 관념에서 자유로워 지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나를 형성시켜 왔고,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준 것이 과거라는
어설픈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내 꿈과 희망을 실현시켜 줄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는,
그 미래에 대한 기대 또한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재로써 본다는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사유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고
우리들 마음 공부에 있어서,
또 세상 사는 삶의 방식에 있어서
아주 소중하고 밝은 삶의 해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로써 세상을 바라보기만 했을 것입니다.
과거로써 또 미래로써 사람이며 모든 사물들을 판단했을 뿐,
지금 이 순간의 현재로써 그 존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과거나 미래가 실존하는 것일까요?
과거나 미래가 있습니까?
과거나 미래를 살아 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린 오직 현재를 살 수 있을 뿐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고 꿈이며 신기루입니다.
여몽환포영이며, 여로역여전인 것입니다.

일 분, 이 분, 한 시간, 한 달, 일 년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지만,
어디 시간을 우리가 볼 수가 있을까요?
시간이라는 것은, 과거나 미래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고 꿈에 불과합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말할 것도 없고,
과거는 우리 머릿속에 기억된 지난 현재의 흔적일 뿐,
실체적이거나 모양을 가진 실재가 아닙니다.
내가 분명히 과거를 살아왔다고 억지를 쓸지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현재를 살아왔지 과거를 살아 오지는 않았습니다.
과거의 그 순간은 분명 현재였지 과거가 아니였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살아온 기억들이나,
현재의 몸뚱이, 성격, 특기, 재능
혹은 현재의 지위나 권력, 돈, 명예
그런 것들이 ‘나’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거나 미래의 모습들을 ‘나’라고 생각하고
우린 끊임없이 과거나 미래로만 세상을 보며 살아갑니다.

물론 미래에 그 어떤 희망을 꿈꾸며 행복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희망이란 우리를 현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미래의 희망을 품는 것은
또 과거의 배운 것들을 잘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은
그동안 아주 바람직하며 올바른 것이라고만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이 우리들 삶의 방식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제 그런 고정관념일랑은 완전하게 비워버리셔야 합니다.
상식은 죄다 쓰레기라고 누가 말했다고 하데요.
또 틱낱한 스님은 희망을 꿈꾸지 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과거나 미래는 환상이며 신기루이기에
과거나 미래에 끄달리고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마음공부, 수행 열심히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느냐고, 나도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답변은 ‘아니요’입니다.
언젠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라는 것을 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그 어떤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걷고 또 걷도 내달리고 있지만
우린 한 발자국도 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로 그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로 볼 수 있어야
아무런 분별도, 잣대도, 옳고 그름도, 맞고 틀림도 없는
온전한 무분별, 무차별의 정견(正見)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라는 바로 이 순간 만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해 있는
자성불, 주인공, 본래 면목, 참나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자성불, 참나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인 것입니다.

이 세상엔 본래부터
옳고 그름이라거나, 맞고 틀림이라거나, 좋고 싫음이란 있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무분별이고 무차별이지
차별, 분별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합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환상의 분별을 만들어 내어
그 속에 빠지고 그로 인해 괴로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어요.
본래 고요하여 한 번도 괴로운 적 없었던 여여한 법계를
사람들이 제 스스로 분별짓고 차별하여
좋고 싫음, 맞고 틀림, 나고 죽음 등의 분별을 만들어 냈고,
또 스스로 만든 그런 분별에 울고 웃고 하며
괴로움과 즐거움에 헤매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세상은 본래부터 고요하고 텅 비어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세상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시간이란 관념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며 과거, 미래가 없으니
물론 현재라고 표현하는 것 조차 군더더기일 뿐이지만,
애써 방편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보니
‘지금 이 순간’ ‘현재로써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현재로 보면
아무런 괴로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로 보고 미래로 보았을 때
즐거움이 있고, 괴로움이라는 분별이 일어나지
현재로 본다면 아무런 분별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순간이라도
그 순간 온전히 현재로 보게 되면,
온전히 깨어있는 마음으로 관하게 되면
그 순간은 ‘괴로운 순간’이 아닌 그저 ‘순간’이 될 뿐입니다.
무분별의 순간이 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현재로 보면
이 세상은 고요하고 텅 비어있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런 분별도 없으며,
그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비로서 그 때
일체 만유의 존재 근원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만물의 성품자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견성(見性)이지요.

지금 이 순간
아무런 분별도 짓지 말고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의 잣대를 다 놓아버리고
오직 현재로써 바라보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그렇게 찾고 있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  몽골...그 바람속으로  ++―― ‥

 

 

 

 

 

 

 

 

 

 

 

 

 

 

 

 

 

 

 

 

 

 

 

 

 

 

 

 

 

 

 

 

 

 

 

 

 

 

 

 

 

 

 

 

 

 

 

 

 

 

 

 

 

 

  

 

 

 

 

 

 

 

 

 

 

 

 

 

 

 

 

 

 

 

 

 

 

 

 

 

 

 

 

 

 

 

 

 

 

 

 

 

 

 

 

  

 

 

 

 

 

 

 

 

 

 

 

 

 

 

 

 

 

 

 

 

 

 

 

 

 

 

 

 

 

 

 

 

 

 

 

 

 

 

 

 

 

 

 

 

 

 

 

 

 

 

 

 

 

 

 

 

 

 

 

 

 

 

 

 

 

 

 

  

 

 

 

 

 

 

 

 

 

 

20090730~0804 

 

 

 

 

 

- 무심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