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미래|********@불교와수학@

2016. 8. 7. 11:09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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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미래

-복잡성현상…‘나비효과’처럼 예측못해-
-불 교 … 인간의 의지가 緣의 흐름 좌우-

불교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음을 전제로 해서 출발했다. 세속적인 모든 행복을 누리던 왕자의 몸으로 처음 실존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 석가모니의 설화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과정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삶에 스스로의 의지를 개입시킬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 이때 비로소 인생의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책상 위에는 화장지를 담은 각티슈가 있다. 이 티슈는 하나를 뽑으면 그 다음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 상자에서 차례로 나오는 화장지는 마지막까지도 순서가 미리 정해져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수많은 조상이 있었고, 그 후에 또한 수많은 후손이 있다. 이들 조상과 자손의 관계는 마치 각티슈처럼 한줄로 엮여져 있다. 그러나 무한히 많은 나의 조상 중 아무도 다음 세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또 나의 자손 모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배우자를 택하고 스스로의 의지를 발동하여 인생을 마친다. 인간의 생로병사의 계열과 각티슈의 차이는 각 단계마다에 있는 의지의 유 무에 있다.

지난 호에는 인생을 함수로 비유했었다. 생을 마친 인간은 정해진 시점에 일정한 공간상의 한 점이 대응하는 것이므로 마치 연속적인 곡선처럼 보인다. 인생의 함수가 그리는 그래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 인생의 역정에는 순간마다 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점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순간에서 행한 일은 다음 순간의 점의 범위를 정한다. 일단 정해진 한 순간에 대응하는 자리는 이미 나의 행로에 편입되어 수정할 수가 없다.

유행가의 가사이기는 하지만 ‘과거를 묻지 마세요’란 말처럼 과거는 현재의 의사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심각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수학에서는 되먹임(feed back)이라고 한다.

역사에는 ‘if(만일)’라는 말이 없다. ‘만일 그때 무엇무엇을 했더라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데…’라는 생각은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이미 어느 순간에 정 해진 사실이 다음 순간, 또 그 다음, 다음 순간의 선택의 범위를 정함으로써 결정 적인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조상을 택할 수 없다. 이미 되먹임되어 나의 생에 펀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되는 일은 가까운 미래에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야기할 수 있다.

실제로 수학자는 단순한 3개의 요인, ‘기압, 풍속, 온도’만으로 정해지는 일기예 보에 있어서도 ‘나비효과’가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나비효과란 오늘 낮에 서울의 종로 거리를 날아다닌 나비의 날개짓이 일으킨 바람으로 인해 며칠 후 뉴 욕에 폭풍우가 일어날 수 있음을 뜻한다.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비가 날고 있다. 그들이 모두가 폭풍우를 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느 특정한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와같이 엄청난 일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되먹임되는 일에는 실존의 부 조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가령 오늘 해가 7시에 뜨고, 6시에 진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이 없는 일 이기에 결정론적 현상이라고 한다.
한편 나비효과는 미래를 알 수 없기에 혼돈, 또는 복잡성의 현상이라고 한다. 인간 사에는 일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인이 있다. 순간순간의 결정이 인생 항로에 되먹임 되어가는 인간의 생애는 복잡성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 행로는 복잡성에 가득 차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다.

한 찰나마다 인간 함수상의 한 점에 자리하는 인간에게는 복잡한 연(緣)의 흐름이 있다. 그 흐름 속의 한 점은 온갖 인연의 결과로 정해져 있고, 또 그것에는 순간마 다 스스로의 의지가 개입한다. 그렇기에 변화를 거듭하는 무상(無常)에는 본질(我) 이 없으나, 그 좁은 틀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를 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무 상, 무아의 큰 바다 속에 가냘프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택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緣)은 미래를 향한 의지로 정해질 가능성을 지닌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