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수행자가 임종(臨終)하는 방법

2016. 10. 30. 18: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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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스님> 참선수행자가 임종(臨終)하는 방법

세등선원 조실로 모신 故전강대종사의 법어를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녹음사정이 좋지 못해서 명확히 알아듣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설사 녹음사정이 좋아서 한 말씀, 한 말씀을 명확히 알아들으셨다 하더라도 법은 알아듣는 것으로써 들음을 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잘 듣고 한 말씀도 이해하지 못한 대목이 없이 조르륵 하니 다 이해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법문을 잘 들었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법문을 듣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이 돈발한 그 사람이 차라리 법문을 옳게 알아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33대 조사이시고 달마스님으로부터 6대 조사이신 육조혜능 스님께서 제자로 계신 하택신회 선사에게 물으시기를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종본(從本) 이래로 저 무량겁 이전부터서 일찍이 생겨난 때가 없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해서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버텨. 항상 일상생활 속에 동작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작하는 가운데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어떻게 모양을 그릴 수도 없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한마디 일러봐라."

 

그때 하택신회 선사는 아주 어린 나이였었습니다. 얼마나 재주가 있던지 한번 듣고 보는 것은 잊어버린 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영리한 하택신회가 떡 앞에 나와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시고, 신회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스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어떻다 모양을 그릴 수 없다고 내가 했거늘, 모든 부처의 근원이니, 하택의 불성이니, 그것은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냐! 너는 앞으로 목숨바쳐 도를 닦아서 너로써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안되겠구나!"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그 뒤 남악회양 선사가 육조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육조스님께서 또 아까 하택신회에게 물으시던 질문을 남악회양에게 하셨습니다. 남악회양은 그 질문을 받고 꽉 맥혀서 무어라고 대답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떻다 입을 벌릴 수도 없고 꽉 맥혀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길로 돌아가서 8년간, 밥을 먹으나, 일을 하거나, 옷을 입거나, 앉으나 걸어가나 누우나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항상 동용(動用) 가운데 있으되 동용 가운데 찾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소소영영한 이놈이 대관절 무엇인고? 무어라고 이름할 수도 없고, 무어라고 모양으로 기를 수도 없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자나깨나 오매불망 가슴 속에 납덩어리가 뭉쳐서 맥혀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알 수 없고 꽉 맥혀서,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고, 반가운 사람을 봐도 반가운 줄 모르고, 산을 봐도 산이 푸른지, 봄이 와서 꽃이 피어도 봄이 온 줄 모르고 8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그러헌 꽉 맥힌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8년이 지난 어느날, 그 꽉 맥힌 의심이 내 가슴 속과 내 몸 밖의 허공세계에 가득 차서 더 이상 커질래야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래야 깊어질 수 없는 상태에 몰입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의심이 툭 터지는데 가슴 속에 맺혔던 납덩어리 같은 놈이 찰나간에 무너져 녹아터졌습니다. 그 길로 육조스님 앞에 나타나서

 

"제가 8년전에 저에게 물으신 그 질문에 대답을 하겠습니다."

 

"어디 한번 일러봐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스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도리어 가히 닦아 증할 것이 있느냐?"

 

남악회양 선사께서 답하기를

 

"닦아 증할 것은 곧 없지 않으나, 더럽혀 물들이는 것은 곧 얻지 못하겠습니다."

 

육조스님이 인가하시기를

 

"옳다 옳다, 너도 또한 그러허고 나도 또한 그러허고 삼세 제불(諸佛)도 또한 이러하니라"

 

이렇게 인가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택신회 선사가 대답한 바와 육조스님의 질문에 남악회양 선사가 꽉 맥혀서 한마디 대답할 바를 모르고 몸둘 곳을 모르고서 물러나가 8년 동안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의심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 상태를 가만히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보십시오. 관조해보십시오.


하택신회 선사는 자기가 듣고 보고 알고 있는 교리, 이론을 지해상량을 가지고 따져서 그럴싸하게 대답을 해올렸습니다. 남악회양 선사는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꽉 맥혀서 무어라고 대답할 바를 몰랐습니다.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물러서서 8년간 그러헌 상태에서 다못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대관절 이것이 무엇인고? 1분, 1분, 한 시간, 한 시간, 하루, 하루가 다못 그렇게 살아갔을 뿐인 것입니다.


하택선사가 하는 그러헌 태도는 사구참선, 의리선(義理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참선. 알음알이로 지식으로 상식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대답을 할려고 하는 이론을 통해서 결론을 얻고자 하는 그러한 태도는, 설사 그 사람이 아무리 영리하고 팔만대장경을 육두로 다 외우고 다 해설을 할 줄 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은 잘되어봤자 지해종사. 입만 까가지고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그러헌 사람밖에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러헌 사람은 스스로 생사해탈을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삿된 길로 이끌어 가다가 자기와 자기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을 무간지옥으로 끌고 갈 일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이론의 학문이 아니요, 지해(知解)로 사리상량으로 따져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녹음을 통해 우리에게 법을 설해주신 故전강대종사께서는 77년을 일기로 이 사바세계를 하직하셨지만은, 21세 확철대오하신 뒤 일생을 통해서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언하대오할 수 있는 활구참선법, 남악회양선사가 8년을 꽉 맥힌 상태에서 8년을 경과환 뒤 확철대오하신 그러헌 활구참선을 우리 신남신녀 사부대중에게 거량을 하셔서 활구참선을 설하시다가 사바의 인연을 하직하셨습니다.

 

활구참선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이 없고, 무어로(無語路)하니 말 길이 없어. 이치 길이 없고 말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론으로 따져서 알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이 말씀이야.

 

자기가 많은 경을 읽고 많은 경을 들어서 그야말로 부처님 이상 가게 불교 교리에 대해서 해박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그러헌 알음알이, 이론, 교리, 지해상량을 놓아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곳으로,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잠시도 아무 생각 없이 단 1분, 1초도 지낼 수는 없습니다. 무엇인가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거나 무의식 중에도 끊임없이 착한 생각, 악한 생각, 착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무기(無記)의 생각. 이런 세 가지 종류의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그리하면서 시간이 지나가고 그러다가 일어나는 생각이 행동으로 표현이 되면 착한 생각이 착한 행동으로 낳고, 악한 생각이 악한 행동을 낳아서 그래서 선업을 짓고 악업을 짓고 그 결과로 해서 육도윤회를 하면서 무량겁을 지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활구참선법은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선, 악, 무기 세 가지 종류의 생각을 버리고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그 생각에서 그 일어나는 당처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을 잘 이해하지 못한, 그리고 참선을 본의 아니게 비방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선은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좋기는 좋지만은 근기가 하열한 이 말세중생은 해봤자 생각이 없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미타불 염불을 하면 그것은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해서 설사 나는 죄가 많고 근기가 하열하다 할지라도 열심히 아미타불 열 번만 불러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지만 참선은 목숨을 다해서 한다해도 근기가 하열한 말세중생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비유해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좋은 나무를 베어서 배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나를 태우러 온다. 나는 그저 무조건 그 배에만 타면 그 사람이 노를 저어서 저 언덕에다 건네주니 나는 다못 믿고 배만 탐으로써 저 언덕에 건너가는데 성공하지만, 내가 손수 나무를 심어서 가꾸어서, 그 나무를 베어서, 내 손으로 배를 만들어가지고, 내가 배 노젓는 방법을 배워가지고, 내 손으로 배를 저어서 저 언덕에 간다면 시간도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그만한 시간과 기술이 없다면 어떻게 저 언덕에 건너갈 수 있을 것인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남이 배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내가 타기만 하면 건너가는 거와 같고 참선을 해서 깨닫는 것은 내 손으로 배를 만들어서 내가 저어서 건너가는 거와 같다. 그러니 참선을 할려고 하지 말고 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러라. 이것이 말세중생에게는 가장 알맞는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떻게 들으면 일리가 있는 그럴싸한 말씀입니다. <아미타경>에도 그러한 요지의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최상승법을 설해주어도 잘 믿을려고 아니하고 믿어지지 아니한 그러헌 중생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한 때 설하신 법문입니다. 그것이 불설(佛說)이지 불설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만, 그때는 그 법문을 설할 수 밖에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설해주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이러한 최상승법을 설해주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법시대가 되었건, 상법시대가 되었건, 말법시대가 되었건 시대에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부처님으로부터 생존해계실 때로부터 처음 천년간을 정법시대다 또는 5백년간을 정법시대다 그런 말이 있지만 부처님 생존시에 살아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믿지 아니한 사람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부처님 열반하신지 3천년이 지나왔지만 지금이라도 부처님이 설하신 최상승법을 믿기만 한다면 누가 깨닫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최상승, 상근(上根)학자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법에는 평등하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무슨 정법, 상법, 말법의 시대에 따라서 정법시대에 태어난 사람만 깨닫고 말세에 태어난 사람은 깨달을 수 없다고 하는 이러한 방편지설을 믿고서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참선을 스스로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애닮고 너무나도 안타깝고, 너무나도 불쌍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이미 철저히 발심을 해서 참선을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 그러헌 원력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계에 40억이 넘는 인구가 있지만, 그 40억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전부 보다 더 행복하기 위해서 각기 자기의 처지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서, 소질에 따라서, 밖으로 밖으로 행복을 찾아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찾아헤매는 행복이라 하는 것은 기껏했자 재산 아니면 명예, 명예 아니면 권리, 권리 아니면 이성, 이성 아니면 맛있는 음식. 그리고서 그러헌 모든 것들을 내 소원대로 얻어가지고 좀 더 편안하게 즐겁게 살자 이것 뿐인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을 구한다는 사람들이 거게개 전부 그런데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조금 낫다는 사람은 권리를 구하고, 그보다 조금 낫다는 사람은 기껏 명예를 구하는데 그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거기에서 한걸음 올라서서 재산이 나의 궁극적인 행복이 아니요, 이성이 나의 궁극적인 행복이 아니요, 명예, 권리가 나의 궁극적인 행복이 아니요, 맛있는 음식,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투철히 아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입니다. 40억 인간 속에서 가장 선택된 도반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서도 소승이나 기타 방편지설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최상승 활구참선법을 믿는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오늘 이 자리에까지는 40억 내지 육도법계 한량없는 중생들 속에서 최고의 환경,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우리가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가야할 길은 여기에서부터입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닦아나가야 하는냐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앞길입니다.

 

아까 조실스님께서 무슨 법문을 하셨냐 하면 소를 찾는 법문, 소를 찾는 심우송(尋牛頌). 마음 찾는 것을 마음을 소에다 비유해가지고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서 방방곡곡을 헤매다가, 깊은 산중에 가시밭길 걸어가기 어려운 험난한 길을 매일매일 쉬지 않고 걷고 또 걷고 그러다가, 어디만큼 가니까 소의 발자취가 있었습니다.

 

그 발자국을 따라 얼마만큼 걸어가니까 저 멀리 나무 그늘 밑에 소의 꼬리가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쫓아가서 잡을려고 하니까 그 소는 깜짝 놀래서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 소를 따라서 따라서 얼마를 가다가 살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 소의 고삐를 잡았습니다. 고삐를 잡히자 그 소는 펄펄 뛰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그 소에 끌려서 얼마를 산으로 들로 해서 얼마를 끌려다니다가 간신히 그 소를 겨우 길을 들였습니다.

 

길을 들였지만 그 소가 까딱하면 곡식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먹을려고 하고 까딱하면 달아날려고 하고 그래서 그 고삐를 놓지 못하고, 항시 붙들어매서 이리저리 혹 내가 그 소를 끌기도 하고 내가 그 소에 끌려가기도 하면서도 종내 고삐를 놓지 않고 얼마동안을 고생을 하다가 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삐를 놓아보았습니다. 고삐를 놓아봐도 그 소가 달아나지를 아니하고 항시 나의 주변을 맴돌면서 풀을 뜯기도 하고 또는 앉아서 아구를 치기도 하고, 또는 피곤하면 잠을 자기도 하고, 또 일어서서 풀을 뜯기도 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고삐를 잡지 않아도 길이 들어서 달아나지 않게 되다가 길이 잘 든 다음에 그 소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내집으로 돌아와서 떡 외양간에 놓아두니 인자는 소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항시 마굿간에 있기 때문에 소를 찾을려고 하는 생각도 없고, 소가 도망갈까 신경을 쓸 겨를도 없고 해서 소에 대한 관심을 놓아버립니다.


얼마있다 완전히 소에 대한 관심을 놓고 자기도 얼마 지나니, 그 소를 찾기 위해서 방방곡곡을 고생을 하고 소에 끌려다니고 소를 길을 들이니라고 얼마를 애썼지만 얼마 지낸 뒤에는 피로도 다 풀리고 소에 대한 관심을 놓아버리니, 자기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금 집에 돌아왔는지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까지도 다 놓아버린 상태입니다. 소도 잊어버리고 나도 잊어버리고.

 

그러니 그때 바람이 불고 잎이 피고 하늘에는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숲에서는 새가 울고 이러한 상태만 남았습니다. 이 자리에는 소도 없고, 소를 찾을려고 하는 삶도 없고 오직 남아있는 것은 새들은 노래하고 싱그러운 바람은 불며 꽃이 피고 잎이 지고 해가 지고 달이 지는 것 뿐입니다. 여기에는 제도 받아야할 중생도 없고, 제도할 부처님도 안계십니다.

 

여러분은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40억 인구 속에서 선택된 가장 복된 도반이라고 아까 제가 말씀을 했습니다만, 새 울고 바람 불고,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잎이 피고 꽃이 지고 있는 그러헌 상황 속에서 본다면 여러분은 여기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이미 여러분은 이러헌 상황 속에 비추어볼 때 얼마나 경거망동을 한 부질없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깨닫기는 무엇을 깨달으며, 찾기는 무엇을 찾는단 말입니까? 제도를 할 사람은 누구며, 제도를 받을 사람은 누굽니까? 언제 소를 잃어버렸습니까? 무슨 소를 언제 잃어버렸기에 피나는 고생을 하면서 소를 찾는단 말입니까?


아까 조실스님께서 법문하신 최초의 말씀이 까마득한 옛날에 소를 잃어버린 사람이 소를 찾으러 나섰다고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 바로 다음에 "소를 찾다니? 그 소가 코밑에 있거늘, 무슨 소를 어디가서 찾느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득이해서 비유를 해서 소를 찾는다 말씀을 하시고, 부득이해서 내가 나를 찾는다고 표현을 했을지언정, 우리가 찾아야할 소는 일찍이 잃어버린 바가 없는 것이고, 우리가 찾아야할 마음, 우리가 찾아야할 나는 잃어버린 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이고, 언제나 나를 잠시도 떠나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것 자체가 이미 찾을 때 잃어버린 것입니다. 찾기 때문에 그 소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헌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에 온 집안을 찾고 뒤지고 합니다. 농 속을 찾고, 서랍을 찾고, 가방 속을 뒤집니다. 안방, 바깥방, 웃방을 전부 찾고 헤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찾다가 찾다가 마침내 자기 호주머니 속에서 나온 또는 가장 찾기 쉬운 그러헌 곳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경험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언제나 나의 가장 가까운 것은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찾을 수록 점점 못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눈 자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 사람 눈은 잘생겼다, 이쁘게 생겼다, 자기의 눈은 어떻게 생겼다, 대충 자기눈이 고리눈이 되었냐, 눈이 크냐, 뱁새 눈이냐, 다른 사람 눈도 알지만 자기의 눈 모습도 짐작은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눈은 실상 한 번도 보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짐작은 하고 있어도 실지로는 본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눈을 볼 수 있었다면 여러분은 거울을 통해서 또는 반사하는 어떤 물체를 통해서 영상을 보았을 뿐입니다. 혹 사진에 나타나거나 거울을 통해서 보았을 뿐 눈 자체는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영상, 그림자, 그런 것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삼라만상을 다 볼 수 있고, 모든 음성을 다 들을 수가 있고, 우리의 손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만질 수가 있고, 그렇지만 만질 줄 알고,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아는 그놈은 여러분은 틀림없이 한번도 본 일이 없고, 들은 일이 없고, 만져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것을 본 일이 있고, 들은 일이 있고, 만져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것의 그림자요 영상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느냐?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는 그놈! 아까 조실스님이 소에다 비교한 그놈! 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나로구나 하면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 나의 그림자요, 거짓 나요. 우리는 거짓 나를 난 줄 알고 그것을 애끼고 다듬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돌아온다는 날 돌아오지 아니하고 몇해나 지나서 소식이 알수가 없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돌아와서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꼭 아들같이 생긴 사람이 왔습니다. 아들이 여러해가 지나니까 커가지고 저렇게 변하는구나 이렇게 아들인줄 알고 얼마를 붙들고 울고 반가와서 그래서 살다가 보니 아 그놈이 사기를 처먹고 살림을 다 지 앞으로 해가지고 홀랑 팔아먹고 도망갔다 그 말이야. 숭악한 사기 강도를 자기 아들인줄 알고 반가이 맞이해서 같이 살다가 온갖 살림을 떨리고 가슴 속에 깊은 상처만 입었다 이 말이야.

 

우리는 가짜 나를 난 줄 알고, 이 몸뚱이가 난 줄 알고. 이 몸뚱이는 지, 수, 화, 풍 4대(大)가 무량겁으로부터 지어놓은 업으로부터 받아나온 이 업신, 이 육체 거짓 몸뚱이를 참 난 줄 알고 이것을 잘 맥이고, 잘 입히고, 잘 거두고, 누가 조금만 욕을 하거나 조금만 때리거나 하면 그 사람을 아주 사생판단을 하고 죽일려고 한다. 그놈을 잘 맥이기 위해서 피 나오는 노력을 해서 돈을 벌어가지고, 분 바르고, 연지 찍고, 아주 이쁘게 만들려 그러고 거기에다가 비씬 돈을 주어서 울긋불긋 좋은 천으로 옷을 해서 입히고, 그래가지고 보약을 맥여서 훌륭하게 만들어가지고 향수 냄새가 풀풀 나도록 만들어가지고 모시고 일생을 그놈을 모시고 산다.

 

아무리 잘 맥이고 잘 입혀도 10년, 20년, 30년, 40년 가면서 주름살이 생기고, 눈이 어두워지고, 흰머리가 나고, 그놈을 감추기 위해서 물을 들인다, 무엇을 바른다, 늙어가면서 점점 더 화려하게 입을려고 야단이지만은 도저히 그놈을 막을 길이 없다가 그럴수록에 점점 초조해지고 점점 노력을 하지만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고, 50세, 60세 가면서 점점 어찌해볼 수 없다가 하루아침에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덜커덕 송장이 된다.

 

안죽을려고 몸부림을 치고 좋다는 약은 몇 백만원이 들어도 좋은 주사는 다 맞아봐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자손들이 재산을 아끼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단 한 달이라도 단 하루라도 사시게 할려고 온갖 노력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동안에 그 놈을 맥이고, 입히고, 잘 단속하기 위해서 갖은 죄를 지으면서 돈 벌려고 애쓰고 애를 쓴 결과로 지어진 죄업만 짊어지고 갈 뿐. 산더미 같이 벌어놓은 재산은 한 푼도 못 가지고 가. 자손이 안타까워서 관 속에다가 돈 뭉탱이를 넣어서 매장을 해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부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도 역시 마찬가지야. 우리가 해야할 일, 거짓 나를 먹여살리느니 도둑놈이 가장해가지고 돌아온 그 자식을 맥여살리려고 하지 말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내. 지금 말하고 있는 이놈, 지금 이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그놈. 내가 나를 찾아야 돼. 이것이 가장 참나를 위하는 길이고 참으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이것을 믿고 이것을 닦아야 하는 것이며, 3천5백만 민족, 세계 40억 인구도 이 법을 믿고 닦아야 하는 것이야. 이것이 바로 진실한 행복의 길을 닦는 것이며, 진실한 평화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이 길이 새마을운동이요, 새마음운동인 것입니다.

 

경제건설, 초가집을 기와로 이고 스레트로 이고, 담장을 울타리를 뜯어내고 스레트로 블록으로 담장을 쌓은 거 그것은 저 껍데기, 농사지어서 얻어진 검불이나 지푸락 같은 그런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곡식 속 알맹이를 먹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지푸락이나 검불이나 껍데기 먹자고 농사 지은거 아닙니다.

 

진실한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은 내가 나를 찾는 공부를 바탕으로 해서 길도 닦고, 담장도 쌓고, 지붕도 새로 갈고, 공장도 건설하고, 경제건설 외화도 획득하고, 나아가서는 예비군, 국군 무력을 증강을 해야합니다. 이 가장 중요한 알맹이인 우리 각자의 마음 닦는 그것을 버리고서 아무리 경제건설을 하고 아무리 무력을 증강을 한다해도 월남과 같은 그러헌 사태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월남이 미국의 원조가 없어서 망했습니까? 무기가 없어서 망했습니까? 사람이 없어서 망했습니까? 우리보다 훨씬 훌륭한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나라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원조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나의 주인, 나의 주체인 참나를 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월남이 망한 것이 우방국의 한 사람이 공산진영으로 넘어간 것은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지만은 그것을 정말 똑바로 보고 판단해서 우리나라를 지키고,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참나를 찾아야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월남 망한 것은 우리의 손실이 아니라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교훈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쯤 말씀을 드리고 그러면 어떻게 나를 닦아가야 하느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찾는 마음소는 저 산너머 골짜기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코밑에 있습니다. 육조스님께서 하택신회에게 물었던 그 문제, 육조스님께서 남악회양 선사에게 물었던 그 문제를 우리는 자나깨나 그것을 궁리를 하고, 그 사람이 얼마만큼 올바르게 얼마만큼 열심히 닦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머지않은 장래에 나의 마음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간단하고 쉬웁고도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도 아무 생각도 없이 있을 때는 없다고 아까 말씀을 했는데,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나는 생각. 우리는 살다보면 많은 속상한 일을 당합니다. 그 속상할 때 무엇이 이리 속상할 줄 아느냐, 속상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우리는 살다보면 많은 근심을 하게 됩니다. 남편 근심, 딸 근심, 심지어는 손자 근심, 이웃 근심 많은 근심을 하게 되는데 근심한다고 일이 잘 되는게 아니야. 근심하기 보다는 무엇이 이리 근심할 줄 아는고? 근심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쁜 일을 당하면 기뻐서 어쩔줄 모르고. 그러나 기쁘다 만 끝에는 반드시 또 근심, 걱정이 돌아옵니다. 그러니 기뻐서 우쭐 댈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이렇게 기뻐할 줄 아는가? 그것을 찾아봄으로써 기쁜 일 뒤에 올 허탈을 미리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량겁으로 오면서 무명심, 중생번뇌망상심, 삼도오욕심으로 인해서 육도윤회를 했지만, 오늘 이 시간부터는 그 무명심, 삼독심, 오욕락으로부터 일어나는 번뇌망상심 그놈을 발판으로 해서 나를 찾는 공부로 들어서자 이 말씀이야. 이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불법 믿는 사람은 응당 이것을 해야만 되지, 이것을 내놓고 껍데기 불법을 믿다가 만다고 하는 것은 보물이 많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보물은 하나도 줍지 아니하고 잡석(雜石)만 줏어가지고 돌아온 사람과 마찬가지다. 일단 보물이 많이 있는 고장에 갔으면 한 개를 줍더라도 보물을 가지고 가야지 잡석을 한 짐을 짊어지고 온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기왕 불법을 믿는 부처님 제자가 되었으면 참 불법을 믿어야돼. 참 불법은 내가 나를 찾는 법.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근심걱정이 있을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이것이 무엇인고? 발심한 사람은 꼭 이 선방에 와서 앉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일상생화를 하는 속에서 얼마던지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발심을 못한 사람은 일생을 머리깍고 선방에 앉았어도 하루하를 그럭저럭 형식적으로 죽비 치면 앉아서 졸다가 방선 죽비를 치면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이렇게 지내면 평생을 선방에 지내도 소용이 없는 것이고.

 

가정에서 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모시고 또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나를 찾는 이뭣고? 이 생각으로 돌아온다면 이 삼천대천세계, 육도법계가 고대로 영산회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부처님 모시고 사는 영산회상인 것입니다.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인 것이며, 제불보살이 계시는 적광토인 것입니다.


생각 하나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무간지옥이 될 수도 있고,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그 무간지옥이 극락정토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인 것입니다. 무엇이 불법이 어렵습니까? 다못 바른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바른 스승 만나서도 철저하게 공부 해나가기가 어려운 것 뿐이지 불법 자체가 멀고 깊고 어려운 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해서 또 자기의 제자에게 전수하고 그 제자는 또 그 법에 의해서 도를 닦고 그 법에 의해서 깨달은 경험을 합쳐서 또 그 제자에게 전수하고 해서 3천년을 내려왔어. 그 방법이 무조건 하고 거두절미하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또한 근심걱정 여러운 일을 당했을 때도 그 당하는 그걸 버리고 할려고 말고 그 생각으로 바로 되돌려서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기란 놈이 쇠로 된 황소 등어리에 입부리를 처박고 황소의 몸에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하는 경우와 같아서, "내가 저 무쇠로 지어진 소에다 이 입침을 박으면 박어질 것인가 말것인가? 도저히 안되겠지" 이런 망설임 없이 들어가고 안들어가고를 막설하고 이 몸뚱이채 그 무쇠로 된 황소의 몸에다 처박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치 2차대전 말기에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가 미국 군함 굴뚝을 향해서 자기 몸과 비행기를 안녕해서 굴뚝을 향해서 자폭을 해들어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가 말세에 태어났는데, 나는 아무 경도 많이 보지 못했는데, 나는 법문도 얼마 듣지 못했는데, 더군다나 나는 여잔데, 나는 사회에서 사는 속인인데 스님네도 하기 어려운 참선을 해서 될까? 안되겠지. 그래도 좋다니까 한번 해볼까? 이런 망설임은 참선에 있어서 대금물입니다.

 

일본사람들이 그러헌 군국주의 사상으로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이지만은, 몸과 비행기가 폭탄을 안은체 적의 군함 굴뚝을 향해서 처박고 들어가는 자폭정신은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될 좋은 교훈의 하나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근기여하도 따지지 말고, 남녀노소도 따지지 말고, 빈부귀천도 따지지 말고, 유식무식도 따지지 말고, 거두절미하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마치 팔십 먹은 노인 할머니가 외아들이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어. 자나깨나 아들 생각, 밥상을 받아도 아들 생각, 맛있는 떡을 받아도 아들 생각, 어디서 젊은 사람을 봐도 아들 생각, 무슨 맛있는 과일을 봐도 아들 생각, 먼 산을 바라봐도 아들 생각,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달을 봐도 아들 생각, 일체것을 삼라만상을 보고 들어도 다 아들 생각뿐인 것처럼 내가 나를 찾는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이뭣고?

 

아들은 언젠가 돌아오면 그만이고, 돌아오지 않아도 설사 돌아왔다 하더라도 사별을 할 걸 돌아와봤자 사실은 별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헌 아들은 그렇게 오매불망으로 찾으면서 무량겁으로부터 잃어버린 나, 참나는 그 아들 천 개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아니겠어요? 아들이 아무리 효자라 하더라도 내 대신 죽어줄 수는 없은 것이고. 내가 지옥에 떨어져서 고를 받고 있을 때 내 대신 지옥고를 받아주지는 못하는 거야. 우리는 나를 내가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도 내 대신 고를 받아줄 수 없는 것이고, 내 대신 부처님이 깨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다못 그 길만 방법만 가르쳐주실 수 있을 뿐이지 나 대신 어찌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합니다.

 

내가 나를 찾아야 합니다. 이뭣고. 이뭣고는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는 이뭣고. 누워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똥 누면서도 하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대관절 아무 재미가 없지. 무슨 맛대가리도 없고. 무엇이 알아지는 것이 있고 되어가는 것이 있어야 재미가 있을 텐데 해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알 수가 없지만은 그래도 그렇게 들어간 사람이라야 깨닫는 것이지.

 

그것을 참지를 못해가지고 자꾸 경책이나 뒤적거릴라 그러고, 자꾸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묘한 말씀이나 들으라 그러고, 묘한 글귀나 알아볼려 그러고,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탤려고 하는 그렇게 쫓아댕겨봤자 잘 되어봤자 지해종사밖에는 안 돼. 생사는 못 면해. 영원히 깨달음에는 도달치 못해.

 

설사 금생에 깨닫지 못할지라도 마지막 숨 넘어가는 그 찰나까지 이뭣고, 열심히 올바르게 하면 3년 안에는 반드시 깨닫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잘못해서 3년이 지내도 깨닫지 못하고, 무엇인가 간절한 생각이 부족해서 10년이 지나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스스로를 단속하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나갈 뿐 조금도 초조한 생각은 낼 필요가 없어. 바른 자세, 깊이 호홉을 들어마셔서 조용하게 내뿜으면서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나가세요.


마지막 숨 딱 끊어질 때도 이뭣고~, 옆에서 울고불고 하거나 말거나 이뭣고~, 딸까닥. 이렇게 숨을 거두셔야 합니다. 이렇게 숨을 거둔다고 하면 염라대왕 앞에 가도 염라대왕이 용상에서 일어나서 합장공경을 하게 되는 것이고, 금방 몸을 바꿔서 인도환생해가지고 바로 정법에 귀의해서 소년시절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년시절에 나이 젊어서 도를 성취한 사람이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 열심히 도를 닦고 마지막 숨 끊어질 그 찰나에도 일념 한 생각이 혼란함이 없이 이뭣고 그 한생각으로 숨을 거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철저히 발심한 사람이 아니면 내가 마지막 돌아가실 때 어떻게 돌아가셔야 되느냐 하는 방법은 깊이 애끼고 잘 말씀을 안해드립니다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꼭 이 돌아가실 때 어떠한 마음으로 숨을 거두어야 하냐 이것은 내가 애끼고 애낀 것인 만큼 오늘은 내가 툭 터놓고 공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생동안 공부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마지막 한 생각 어떻게 가지고 가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생에 지옥에 떨어지느냐, 축생이 되느냐, 사람이 되느냐, 천상에 가느냐 하는 90점 이상 중대문제가 마지막 임종 시 한 생각에 달렸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일생동안 그럭저럭 지내고 하고 싶은대로 향락을 하다가 마지막 숨 거둘 때 그 때 한번만 이뭣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혹 생각하실런가 모르지만 그것이 그렇게 안됩니다.

일생을 피나는 노력을 해서 해놔야 마지막 숨 거둘 때 그것이 되지 일생 동안 안해놓은 사람은 그때 도저히 자기가 자기 생각을 단속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숨이 넘어질라고 할 때 이 세상에 맛본 어떠한 아픔, 괴로움보다도 그 마지막 숨 거둘라고 할 때의 아픔과 괴로움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견딜수만 있다면 우리는 안죽는 것입니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정신으로 이뭣고가 되겠습니까? 안돼!


그래서 일생을 자나깨나 해놔야, 그 숨이 떨어질라고 헉~헉~ 눈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이뭣고? 그런데 그렇게 괴로운데 아들 생각은 아들이라고 하면 눈이 번쩍 뜨거든 그것이 왜 그러냐? 일생 동안 아들 생각만 했거든. 아들 생각 해봤자 아들이 내 숨 대신 가져오들 못해요. 그러니 아들 생각은 인자 그만큼 하셔야 돼.

 

정말 아들을 생각하고 정말 집안을 생각하신다면 이뭣고를 정말 열심히 하셔야 돼. 그러면 그 공덕으로 아들도 잘 되고, 집안도 잘 되고, 나라도 잘 되고, 세계도 잘 되고, 영원한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 1977년 4월 17일, 세등선원 하안거결제 법문


선업이 있으면 그 자체에 갖추어진 힘 때문에 좋은 업보를 받게 된다.


나라의 왕이 편들어 주는 힘이라 할지라도 업력에는 못 미친다.


(대승장엄론)



 


보시는 큰 부의 문이 되며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문수사리정률경)



 


계율과 선정과 지혜에 의해 해탈을 얻었고


해탈의 지혜에 의한 통찰력을 갖추었으며


진실과 자비와 관용 그리고 인욕으로 충만하여


그의 사랑은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감싸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를 일러 전능한 부처라 부른다.


(본생경)



 



 


노여움과 인색함에서 떠난 사람


좋다 싫다를 모두 버린 사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숫타니파타)



 


권선 순례!  



강원도 사찰부터 돌기로 계획을 세운 명성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부터 갔다.


명성 스님이 오대산 월정사를 제일 먼저 택한 것은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에 가서 참배부터 하고 싶어서였다.


평창에 도착한 명성 스님은 감개무량했다. 평창에서 중학교를 다녔으니 평창은 자신이 소녀 시절을 보낸 고장이다. 아버지인 관응 스님으로부터 세계 위인전을 선물 받아서 밤새워 읽었고, 상원사를 오르내리면서 한암 스님에게 사탕도 얻어먹고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라는 가르침도 받았다.


아득한 기억 속에 잠시 잠겼던 명성 스님은 적멸보궁으로 올라갔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하늘은 너무도 맑고 청청했다. 보궁에 오른 명성 스님은 부처님을 향해108배를 했다. 이번 권선 순례가 무장무애 속에서 끝날 수 있기를, 그래서 학인들이 편히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를 기원하면서 기도했다.


이렇게 시작한 권선 순례는 강원도, 경기도, 서울, 충청도, 경상도, 부산을 돌면서 끝마쳤다. 그동안 몇 번 운문사로 돌아와 공무를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명성 스님은 추운 겨울을 권선 순례로 보냈다.


그렇게 권선을 마치고 운문사로 돌아온 날 저녁, 명성 스님 입에서 어금니 두 개가 빠졌다. 이 사실을 누가 알까? 함께 살고 있는 시자스님은 알았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명성 스님은 자신의 입에서 어금니 두 개가 빠져나갈 만큼 힘들었음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다음 해인 1989년 6월, 청풍료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건물이 완성되자 사미니반, 사집반 학인들은 넓고 쾌적한 공간으로 이사해 공부를 계속했다. 사미니반, 사집반은 청풍료에, 사교반은 금당에, 대교반은 설현당에서 공부했다. 이제 운문승가대학은 학인들이 공부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비구니 교육 기관으로 그 면모를 갖추었다.



남지심 평전소설 <명성> 중에서 - 불광출판사




 


명예욕과 탐욕 그것은 아침 이슬과 같고


고통과 번민 영화와 출세 그것은 저녁 무렵의 연기와 같다.


(자경문)



 


부처님은 누구신가



/부처님이 병으로 고생하시다/


| 상윳따 니까야: 7 브라흐마나 상윳따 2:3 |



이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풍병으로 괴로워하셨다. 그때 우빠와나 존자가 부처님의 시자였다. 부처님은 우빠와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빠와나, 더운물을 좀 가져오너라."


그래서 우빠와나는 브라흐민 데와히따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한쪽 켠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비구여, 무엇이 필요합니까? 무엇을 구하러 왔습니까?"


"깨달으신 분, 복덕이 구족하신 성자께서 풍병으로 고생하고 계십니다. 브라흐민이여, 더운물을 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브라흐민은 사람을 시켜서 더운물과 물지게를 가져오게 하고, 한 자루의 당밀을 우빠와나에게 주었다. 우빠와나는 돌아와서 당밀을 더운물에 타서 부처님이 마시도록 하고 더운물로 목욕을 시켜 드렸다. 그 후 부처님의 병은 나았다.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건강할때 빨리 복덕을 지어야 하니


병이 들면 복덕을 닦으려 해도 몸과 힘이 허락하지 않네.


(대장엄론경)



 


재물과 색의 화는 독사보다 심하다.


(계초심학인문)



 


만약 물이 항상 있다면 우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만약 욕심이 전혀 없다면 무엇을 바라고무엇을 구하리.


(소부경전)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의 허물만 찾으러 다닌다.


(불설무희망경)



 



 


불자는 바로 나 자신이니 부처님의 입을 따라 태어났고


법의 교화를 따라 태어나 부처님 가르침의 한 부분을 얻는 것이니라


(잡아함경)



 


비록 사람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뒤에 삼가 다시 짓지 않으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 구름을 벗어난 달과 같이


(법구경)



 



 


자기의 본성을 깨치라!  



견성(見性)이란 곧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견성으로 신심이 두터워지는 것이 가장 가치가 높습니다.


옛날 푸젠성 푸롱산에 계시던 영훈 선사가 어느 날 귀종 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사께 가르침을 청하건대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말해줄 수 없네, 말해줘봤자 믿지 않을 테니!"


영훈 선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어찌 안 믿겠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귀종 선사의 대답이 실로 엉뚱했습니다.


"그렇다면 말해주지, 바로 네가 부처야!"


영훈 선사는 이 말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다고 합니다. 만약 지금 제가 "여러분이 모두 부처입니다!" 하면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도 '내가 보기엔 아닌데…'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귀종 선사가 "눈에 티끌이 들어가 있으면 헛것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모든 상을 여의면 곧 모든 부처님을 보게 된다"고 말했듯이 우리가 자성(自性)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모두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너와 나, 옳고 그름, 좋고 나쁜 것, 괴롭고 즐거운 것 등의 분별로 따지니, 마치 색깔 있는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처럼 세상 본래의 모습을 잘못 알며 자기의 본성마저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황벽희운(黃檗希運,?~850) 선사가 당 선종(宣宗)의 출가 시절에 나눈 문답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승가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라


不著佛求 不著法求 不著衆求 



신앙은 자신 밖에 있는 세상사로 인해서 눈이 어두워져 자기의 본성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으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는 우리의 자성 가운데에 본래 갖춰져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불법승 삼보는 신앙의 과정에서 하나의 보조적인 인연으로 결국은 자기를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불성이 있다.'는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면 신심을 반드시 두텁게 할 수 있습니다.

성운대사 <보통중생 보통부처> 중에서 - 모과나무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


(숫타니파타)



 


부처님은 누구신가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 상윳따 니까야: 7 브라흐마나 상윳따 2:1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브라흐민 마을인 에까날라에서 가까운 마가다 사람들이 사는 곳인 닥키나기리에 계셨다. 그때 브라흐민 까시 바라드와자는 파종할 때가 되어 오백 개의 쟁기를 멍에에 실었다. 이때 부처님은 탁발하기 위해 까시 바라드와자가 마침 음식을 분배하고 있는 곳으로 가셨다. 브라흐민 까시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을 보고 말하였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그대도 또한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드십시오."


"브라흐민이여, 나 또한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따마 존자님의 멍에나, 쟁기, 밭가는 연장, 소몰이 막대, 황소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고따마 존자님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는다고 하십니다."


브라흐민 까시 바라드와자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대는그대는 밭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대의 밭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그대가 밭가는 사람이라면, 말해 주시오


그대의 밭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에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믿음은 씨앗이며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나의 멍에와 쟁기이며,


마음은 멍에의 끈이며, 부끄러움은 막대기이며,


마음챙김은 보습과 소몰이 막대일세.



몸을 단속하고, 말을 조심하고, 음식을 알맞게 먹습니다.


진실은 나의 제초기이며, 온화함은 멍에를 벗음일세.


정진은 나의 짐을 진 소이며,


속박으로부터 안온함으로 이끈다네.



쉬임 없는 정진으로 슬픔 없는 곳에 이르네


이렇게 밭갈이가 끝나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네.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주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개설


보물 제406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덕주사는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건립한 절이라고 하는데, 한국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마애불은 남쪽 화강암 벽면 가득히 부조되었는데, 얼굴과 어깨는 도드라지게 조각되었고 그 아래는 선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법의의 옷주름도 도식화되어 그 규모에 비하여 조형 수법은 졸렬한 편이다. 마애불의 양어깨 위에는 사각형의 건물 가구공()들이 남아 있어, 조성 당시 목조전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소발()의 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비만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과장되게 표현되어 예배상으로서의 숭고미는 찾아볼 수 없다. 목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얼굴이 상체에 맞붙어 버렸으며, 삼도()는 가슴 위에 선각되어 있다. 비만한 신체 역시 인체의 조형적 특성이 무시된 채 괴체화()되었다.


통견()의 법의는 힘없이 늘어져 원호를 그리고 있다. 옷주름 역시 힘이 빠져 생동감을 잃었다. U자형으로 늘어진 법의의 앞자락과 양 무릎 위에 표현된 동심타원형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의() 형식이 도식화된 것이다. 왼쪽 팔목에 걸쳐 흘러내린 소맷자락도 무의미한 몇 가닥 음각선으로 주름져 있다.


지나치게 과장된 양손은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향하고 있어, 아미타불의 구품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법의 자락 밑으로는 평행하는 세로줄의 옷주름을 새긴 군의()가 표현되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다. 발 좌우에는 발을 감싸듯 너비가 넓은 앙련(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을 배치하여 대좌로 삼았다.


고려 초기의 거불 조성의 추세에 힘입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비만한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한 조형, 입체성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그리고 현저하게 도식화된 옷주름 등의 조형 수법은 불상의 규모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제작 시기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나는 행복한 사람

                                           

 

 

 

  "걸을 수만 있다면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 수만 있다면,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 수만 있다면,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럴게 기도를 합니다.

 

Donald Zolan oil painting of children

 

수만 있다면,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지혜롭지 못해도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인생.


 

,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언더우드 기도문 중에서-

 

 





주신것에 감사의 고백

                                모란 이정숙


  모든 소유에 사랑, 건강, 축복,을  

  아낌없이 주신것에 감사의 고백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고난은 주지 아니하시며

시야를 넖혀 기도의 능력에 힘을 주셨으므로


기도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리라는 말씀 믿고 

기도하면 어떤 고난도 감당할수 있게 하시리니


 원망 보다도 주의에 상황과 현실에 따라

 할일을 해결하지 못했더라도 후회 없이

 지금까지의 주신 은혜에 감사 기도를 드리렴니다 







Virginia Mayo - I'M GONNA TEACH YOU SOME BLUES - 1948.av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