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업|********@불교와수학@

2016. 11. 27. 17:15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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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업

-개인생애·민족역사 되먹임의 축적-
-무아론 불교‘무엇이 윤회하는가’-

불교는 약 2천5백년전 인도 소왕국의 왕자의 몸으로 태어난 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다. 그의 교리 속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인도의 사상·종교적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도 있다.

어떤 종교적 창조에도 모태가 있으며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가 없다. 인도의 전통적 사상인 힌두는 ‘범아일여(梵我一如·대우주의 본체인 프라푸만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은 일체이다)’를 주장하는데 이 입장을 완전히 부정하고 철저하게 ‘무아(無我)’를 주장한 것이 불교이다. 그러나 업에 따른 윤회사상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힌두사상은 <우파니샤드>에 결집하고 있다. 그것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여러 단계의 생을 갖는다는 업(갈마)의 법칙과 유일절대의 실체이자 영원한 보편적인 존재인 프라푸만(梵天)의 원리로 성립한다.

갈마(業)의 법칙에 의하면 사람은 생애를 통해서 여러 업을 축적한다. 그 업은 인간의 욕망, 본능, 물욕, 노여움, 시기질투 등의 삼악(三惡)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사후 곧바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데 이때 전생에서 축적한 업이 클수록 천하고, 고통이 많은 것으로 태어난다. 이승에서 얕은 계급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의 업의 결과임, 그 속에서 반항하거나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고 자신을 억제하면 보다 나은 내세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벌레도 전생은 인간일 수 있다. 노예도 귀족도 전생의 업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필자는 10여년 전 인도여행을 하면서 엄격한 카스트(계급)사회를 목격했다. 카스트제를 주축으로 하는 계층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는 업의 생각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일이 매우 적절함을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불교는 이 윤회사상을 통해 자비와 실상계로 고도의 도덕심을 갖게하며 특히 스스로의 힘으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절대적 구제가 가능해진다.

불교는 카스트의 제일급인 브라만 계급의 승려에 의해 독점되고 경직화된 형식주의, 타락한 힌두교의 본질을 승화, 인간화시키는데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윤회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중생에 대한 구제의 길을 크게 열어 놓은 것이다.

아(我·본질)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인 힌두에는 윤회사상은 명확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그러나 무아(無我·본질이 없다)의 불교에 있어서는 ‘무엇이 윤회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명쾌한 답이 없다. 이 물음에 대해 어느 학자는 벌레가 식물을 먹고, 그 생명이 벌레의 생명 속에 재생하고, 벌레가 새의 먹이가 됨으로써 그 생명이 생의 생명에 재생되고… 인간의 생명 역시 여타의 생명체에서 얻는다.

인간이 죽으면 대지에 돌아가 식물의 영양이 된다. 이와같이 각 단계의 생명을 윤회전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먹이가 된 것은 물질이며 이 순환은 단순한 물질순환에 불과하다. 본래 윤회는 정신적인 순환이며 정신이 여러 물질적 생명 상이를 전전해가는 상태를 말한다.

가끔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나와 화제를 모을 때가 있으나 그 내용은 애매하며 아무도 정확히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전생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전생을 믿었던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이 전생의 기억이 없음을 재미있게 설명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모태에서 좁은 산도를 통해 이승에 나오는데 그 때 머리를 강하게 압박받음으로써 전생의 기억을 잃는다.’ 그러나 이 설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윤회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여긴다. 업은 전생,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어떤 정신적 육체적 언어적 행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마음, 육체, 사회에 그 흔적을 남긴다. 수양이 쌓이고 지식이 축적되고 몸이 단련되는 것도 모두 업의 결과이며 심지어 최고의 경지인 부처도 될 수 있다. 개인의 생애, 민족의 역사는 모두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되먹임의 축적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
목소리가 좋은 사람...


얼굴이 예쁘고 잘 생긴 사람...
마음이 너무나 예쁜 사람...


 

 


애교가 많은 사람...
곰 같은 사람...
다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다른 느낌의 사람들이
주는 행복도 모두 다르다.


 

 


만나면 웃음이 나오게 하는 사람...
만나면 애처로와 보이는 사람...
만나면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의 사람...


그리고 만나면 마냥 행복한 사람...
가는게 너무나 안타깝게 만드는 사람...

 

이렇게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주는 
공통점은 기다림이 있다는 것이다.


언제 누굴 어떻게 만나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기다림이 절대 싫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음에 
그 기다림이 행복인 것이다.

 

하루가 될지,한달이 될지 
일년이 될지,

 

아니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라도
기다림이 있기에  
하루 하루가 행복인 것이다.


 


기다림이 있는 동안은
그 누구보다 행복인 것이다.


평생을 기다리는 행복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지라도
나에게 기다림이 있어 행복한 하루다.


 

 


사랑이 있기에 기다림이 있고
그 기다림이 있기에 행복인 것을...


오늘도 나는
행복을 얻기위해 기다림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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