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15. 11:58ㆍ일반/생물·과학과생각
<71>무분별지
큰스님과 대수학자 공통점
분별초월한 순수 직관
불교와 수학의 차이 보살행
지난호에서는 수학적 귀납법과 법장대사의 자연수에 대한 생각에 공통점이 있음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수학(넓게는 과학)의 지혜는 어디까지는 추리, 비교, 유추에 있다. 추리·비교·유추는 대상들 사이에 있는 같음과 다름을 구별하는 작업, 즉 분별의 세계에 있다. 한편 불교의 근본적인 지혜는 분별을 하지 않는 무분별(無分別)의 지혜이다. 여기에서 ‘무분별지를 근원으로 삼는 불교적 지(智)와 수학의 분별지에 왜 공통점이 발생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이 나온다. 불교적인 무분별지는 단순히 분별을 초월한 지혜라고는 할 수 없다. 분별을 넘어선 그 부분이 곧 수도와 자비를 포함한 불교적 행위(보살행)의 근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랍의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해보시오. 나는 그 말이 잘못임을 입증해 보이겠소. 또 다음에는 처음 한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해보시오. 역시 그것도 부정해 보겠소.’인간의 언어(분별의 세계)로는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주어진 화두에 분별지로 씨름하면서 마지막 단계에 깨우침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분명히 무분별의 지혜이다. 선을 통한 깨우침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으며 추리·비교·유추의 단계에 있지 않다. 본래 화두 내용은 분별지로는 닿을 수 없는데 그 내용을 따지고 있다가는 때로 몽둥이가 날아오기도 한다(棒喝). 비수와도 같은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선기(禪機)를 잡은 경우도 있다. 삼매경(三昧境)의 상태(定)와 깨우침의 지혜도 구별되지 않으며 그것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큰스님이 깨우침을 얻은 일에 관해서는 많은 신비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때로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미숙한 사람이 엉뚱하게 스스로 깨우침을 얻었다고 내세우는 것을 야호선(野狐禪)의 경지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한 무념무상의 경지가 깨우침에 직접 이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자연수에 관한 귀납법적 원리를 파악한 ‘십현연기무애법문의(十玄緣起無碍法門義)’와 같은 철리를 얻은 법장대사는 결코 무념무상만을 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별지를 확고히 딛고서 그것을 넘어 큰 깨우침을 얻은 법장의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분별의 세계를 공(空)의 철학으로 철저하게 관찰한 뒤에 얻은 순수직관의 결과이다. 순수직관은 대상을 관통하는 철리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작동하는 것, 곧 의지적인 사유에서 나온다. 공의 철학이 투철하였기에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그것에 내재하는 연기의 이(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법장은 공(空)철학의 기반에서 전우주의 끝까지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법장의 자연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理)를 파악하는 것은 낱낱의 수에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공(空)의 관점에서 출발한 순수직관의 지혜이며 무분별지이다.
수학자의 대정리의 발견에도 큰스님의 무분별지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수학의 기초를 따지는 것은 수학적인 분별지라기 보다는 법장의 경우와도 같은 순수직관인 무분별지였다. 다만 불교적 무분별지가 수학의 경우와 다른 것은 보살행이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자연수의 세계로 돌리자. 수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 ‘2’라는 것은 두 개의 사과와 두 마리의 새에 공통되는 성질인 개수를 갖는다. 즉 ‘양’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첫 번째 두 번째와 같이 순서를 나타내기도 한다. 지금 누군가 ‘n’이라는 수를 말했다면 과연 그것은 n개 또는 n번째의 수를 말한 것일까. 옛부터 수학자들 사이에는 ‘개수의 수가 먼저 나왔는가, 아니면 순서의 수가 먼저 나왔는가?’의 논쟁이 있었다. 여기에는 개수와 순서의 개념이 연기로 얽혀 있으며 이들의 상반되는 의미가 동시에 인식되어 있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이다. 이것을 판단하는 일은 무분별지의 세계이다. 또 자연수 전체가 모여서 생기는 수는 무엇이냐, 더 나아가서는 분수까지 포함한 유리수체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수 전체의 크기를 파악하는 것은 무분별지일 것이다. 이럴 때에는 기존의 틀(분별)을 넘어서는 무분별지가 작동한다. ‘침묵여뢰(沈默如雷:벼락소리와도 같은 침묵)-<유마경>’와도 같이 큰 깨우침을 얻은 무분별지혜는 대수학자의 분별지와도 같은 기반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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