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안에서 연기를 보는 법

2017. 3. 19. 11: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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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떨림이란/김홍성


자신안에서 연기를 보는 법

 

십이연기를 학문적으로 책 몇권의 분량으로 널어놓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법이 실제 자신에게 비추어 어떻게 일어나며 연기를 끊는다함이 내안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가를 정리하지 못하면 십이연기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희론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요? 그러한 설들이 자신안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펼쳐지고 어떻게 끊어져서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인가의 문제가 정말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희론은 떠벌려 놓을수록 내자신의 문제와는 멀어지고 정작 보라는 것에는 집중할 수 없게 만들 뿐입니다. 연기를 알고 본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통찰하고 본다는 의미입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본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문제를 떼어놓고 연기를 떠들어대본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괴로움의 소멸은 나와는 점점 먼 이야기가 될 뿐이고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불세계에 대한 갈망만 키워갈 뿐입니다.

 

연기에 대한 설이 이토록 분분한 것은 자신안에서 괴로움의 발생을 보고 그것이 일어나는 원인을 찾고 그것이 소멸하는 길을 찾으며 괴로움의 소멸로 얻어지는 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부처의 법을 자기밖의 우주전체, 관계지은 사람, 삼라만상 모두로 들고가버렸기에 자신에게 또렷해지라는 가르침을 잃고만 결과입니다.

 

연기를 보기 위하여는 우선 먼저 부처님께서 보라고 하신 세계라는 것의 의미부터 명확하게 정리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연기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을 바탕으로 놓고 설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법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자연현상이라던가, 우주의 법칙으로 들고가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괴로움의 소멸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뜬구름잡는 설들을 늘어놓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계라는 것, 일체라는 의미를 경전을 통하여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왓차곳따가 여쭈었다.

“고따마시여, 이른바 일체법一切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부처님께서 왓차곳따에게 말씀하셨다.

“눈眼으로 사물의 형체色를 대하게 되면 사물의 형체를 분별하는 안식眼識이 생긴다.

귀耳로 소리聲를 듣게 되면 그 소리를 분별하는 이식耳識이 생기고,

코鼻로 냄새聲를 맡게 되면 그 냄새를 분별하는 비식鼻識이 생긴다. 

혀舌가 맛味을 대하게 되면 그 맛을 분별하는 미식味識이 생기며,

피부身가 촉觸을 대하게 되면 그 촉감을 분별하는 신식身識이 생긴다.

뜻意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法 그것들을 분별하는 의식意識이 생긴다.

이처럼 우리의 내적 감각기관이 외적대상六境을 만날 때 여섯 가지 분별六識이 생기는데十八界, 이때에 좋다樂·나쁘다苦·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不苦不樂는 감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감각들을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말하는 일체법을 부정하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일체법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언설일 뿐이요, 그것에 대해서 물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혹만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제 13권〈321.일체법경一切法經〉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천명하셨습니다. 이 세계안에서 경험적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에 한하여 세계라는 명칭을 허용한다 하신 것입니다. 모든 추론을 금지한 것은 바로 이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을 천명하노라.

 

4.“걸어서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도 없다네.

  그러므로 세상을 알고, 슬기롭고,

  세상의 끝에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했고

  모든 악을 가라앉힌 자는 이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앙굿따라니까야 제 2권〈로히땃사경2〉154쪽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이 필요합니다. 육근(안이비설신의)이 육경을 접촉하여 인식하게 되는 육식으로서의 세계-이것을 벗어난 세상을 부처님은 논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고 들어가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의 감각기능 모두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보고,듣고, 냄새맡고,맛보고 감촉하고-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의근으로서의 기능이 종합되어 육근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육근중 앞의 안,이.비,설,신은 그 기능 하나가 마비되어도 다른 것이 그 기능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근이라는 것은 잘못되어버리면 앞의 오근 모두가 마비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뇌사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근의 기능이 경계와 대면할 때 일어나는 의식들을 육(안이비설신의)식이라고 표현하지요.

 

이러한 과정을 근경식의 삼사화합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인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근경식 세가지가 합쳐지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기에게는 이미 이러한 근경식의 삼사화합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 경식 삼사화합의 과정은 자궁속에서 수정된 후 세포분열의 과정을 거쳐 온전한 육근의 형태가 갖추어진 후 이미 자궁속에서부터 시작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뱃속에서의 태아도 듣고 감촉하고 느끼고 하는 기능을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아기에게는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은 없습니다. 그렇게 삼사화합을 갖춘채 태어난 아기의 의식속에는 주변환경(부모, 양육환경)을 끊임없이 접촉하여 셀 수없는 인식이 심어집니다. 그러한 단편적인 인식들이 기억이라는 뇌작용으로 연결되어 어느 시기에 ‘나’라는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초가 되어 그 이후 아기는 ‘나’‘내것’ 이라는 인식을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체계속에서 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경전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욕계의 다섯가지 결박(오하분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느냐?”말룽키야뿟따가 말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육신에 대한 잘못된 견해(유신견.탐욕적인 욕망.선냄.계율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

“내가 그와 같은 번뇌의 요소들이 어디에 잠재되어 있는지를 비유로서 말하겠다.

반듯이 누워만 있는 천진난만한 갓난아이에게는 ‘내몸’이라는 의식이 없다. 그처럼 갓난아이가 어떻게 ‘내몸’이라는 견해를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내 몸’이라는 견해를 일으킬 성향은 갓난아이속에 잠재되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는 ‘관념’이란 없다. 어떻게 그 갓난아이가 관념과 같은 복잡한 생각을 일으키겠는가? 하지만 관념과 같은 복잡한 생각을 일으킬 성향은 갓난아이에게 잠재되어 있다. ...<이하생략><잡아함경중에서>

 

이러한 잠재성향이라는 것은 요즘말로 표현하면 유전자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미 아이의 DNA속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부모의 성향들, 체질들 성격적 요인들 이런 것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돌연변이라는 것이 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외계인이 태어나는 돌연변이는 없습니다. 부모가계의 유전인자의 조합상 어느 요인에 의해 두 부모와는 전혀 무관한 듯이 보이는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일 뿐이지 그러한 돌연변이상황을 가지고 그것을 전생의 알지못할 업인으로 들고가는 것은 추론을 금지한 부처의 가르침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실증적인 과학적 설명에도 합당하지가 못합니다.

 

아기에게 잠재성향으로 숨어있던 것들이 주변의 경계와 대면하면서 어느 시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식을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십이연기의 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생은 ‘자아’라는 것이 있음을 주장하며 그 이후 끊임없이 인간의 인식속에서 이어집니다.

이러한 인식의 발생의 시초부터 이어지는 과정을 사고하지 못하면 과거생으로부터 이어진 전생의 업력이 자궁속에서 태어남을 말하는 것으로 십이연기를 풀어가게 됩니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 한번의 발생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러한 설명이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속에서 인간을 가장 얽어매는 고통은 바로 이 ‘나’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 주장이 끊임없이 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거듭 태어나는 윤회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 윤회의 처음 시작은 언제였는지 그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아기였을 때 내가 언제 나를 ‘나’로 인식하게 되었는지 그걸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까지의 과정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처음의 '생'이 태어남 속에는 이미 그 앞의 모든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씀이지요. 

 

처음 자아식이 발생한 이후부터 아기는 주변경계와 대면하여 ‘나’‘내것’이라는 인식을 끝없이 등록시킵니다. 십이연기를 일렬로 늘어선 하나의 순차적인 과정으로만 이해하면 이러한 과정-인간인식의 발생과정을 개념적으로 도식화해버리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십이연기는 생이라는 인식의 발생속에 그 앞의 모든 과정이 중첩되어 동시발생한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명, 행 식 육입 명색 촉 수 애취유 생 노사 이 모든 것을 따로 따로 놓고 자신에게 대입해 보면 머리만 아파올뿐 해결나는 것은 없습니다. 개념으로 이것을 이해하자면 자신이 걸려있는 고정관념들부터 깨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들-영혼, 업, 윤회..이런 고정불변의 사고들이 나의 인식을 어떻게 묶고 있는가부터 확인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머리로 궁리하고 짜맞추어서 이해할 수 있는 법이 아님을 되풀이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정관념들이 나에게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나의 사고를 묶고 있으며 어떻게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만들고 나의 괴로움과 갈망을 일어나게 하는것인가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의 법은 이렇게 현실에서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현상을 통찰하여 그 흐름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십이연기로 말씀드리면 무명행식육입명색촉수애취유까지를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고 그 뒤의 생노사를 현실에 묶여 드러나는 밖의 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현상을 통찰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할 때 꼭 알아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십이연기의 통찰은 상황에 따라 구연기로, 십연기로, 팔연기로 자유자재로 설해졌습니다. 부처의 법은 묶이지 않는 법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현상을 통찰하게 되면 어떠한 상황에 꿰어 맞추어도 어긋나지 않는 연기의 흐름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자신을 대면함도 없이 언어에 묶여서 머리만 굴려서 풀어낼려고 하니 온갖 설이 난무하게 되고 그 결과로 추론을 금지하시고 지금여기에서 깨달아라 라고 말씀하신 부처의 가르침을 전생의 업력으로 돌고돌아 육도를 돌고, 어느 먼세상 불세계에 가서 깨달아서 윤회를 끝낸다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지요.

 

연기를 보는 방법에 순환연기와 환멸연기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순환연기란 연기의 발생과정을 설해 놓은 것이고 환멸연기는 연기의 소멸과정을 설해 놓은 것입니다. 연기를 본다는 것은 자신안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발생과정 전체를 보는 눈이 생겼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이연기 전체를 보는 눈이 생겨나야 비로소 순환연기와 환멸연기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소멸을 자신안에서 확인하신 것이지요. 생노사의 발생을 보고 거꾸로 추적하여 들어가 인간의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어리석음이라는 무명에 있음을 보시고 그것이 소멸하므로 행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고 명색...육입..이렇게 소멸하는 괴로움의 소멸-사성제법을 천명해 내신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의 법은 어느 한가지를 보았다 하여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안에서 십이연기가 동시생멸하는 것을 또렷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려면 스스로의 문제가 자아에 취착하여 ‘나’라는 것이 있음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아는데서부터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자아취착의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핵심열쇠입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얽어매는 가장 큰 원인인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굳게 믿고 그것에 무섭게 취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말이 쉽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벗어나서 연기를 볼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거쳐가셔서 이정표를 세워두신 것입니다. 후대의 우리모두가 찾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법이 자신의 문제를 보는 것과 떨어져 인과를 논하고 우주의 법칙을 논하고 자연현상의 성주괴공을 논하는 희론으로 어지럽게 가지를 뻗어나가면서 부처님께서 처음에 가르치신 탐진치의 소멸, 고의 소멸과는 전혀 상관없는 쪽으로 가고 만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안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환멸연기로 연기의 소멸과정을 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자신안에서 실제로 번뇌가 소멸하는 것을 보고 확인하게 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경전의 한 구절인

-세상의 끝에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했고

  모든 악을 가라앉힌 자는 이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와 같은 일이 실제로 자신안에서 일어남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끝이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의 인식의 끝-소멸-환멸연기를 확인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악을 가라앉힌자 라는 의미도 몸뚱이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 생각이나 느낌으로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부처의 가르침은 또 다시 머나먼 불세계의 자리로 밀려나 버립니다.

 

이것은 자신의 인식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에 묶이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허망한 인식에 묶여서 이리저리 쏠려나가는 허망한 업을 짓지 않으므로 청정범행을 완성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편의 재치 한마디..


이웃집에 다녀온 순이 엄마는 무척 속이 상했다.
이웃집 여자가 생일 선물로 남편에게

화장품 세트를 받았다고 자랑 했기 때문이다.


순이 엄마는 남편에게 막 신경질을 부렸다.

"옆집 짱구 엄마는 생일 선물로 화장품 세트를 받았는데

당신은 뭐에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내 생일 때 통닭 한 마리로 때우고-"

그러자, 순이 아빠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그 여자 참으로 불쌍한 여자구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여자가 불쌍하다니

무슨 말씀이에요"



남편 왈.

"짱구 엄마가 당신처럼 예뻐 봐,

 화장품이 뭐 필요 하겠어?"

 

 

보리밥 한쌍 차려습니다.

  맛나게 드시고  모두모두  건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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