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4. 18:2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삶의 창조를 뛰어넘으라
그러면 이제 좀 어떻습니까?
이제 좀 현실에서 잘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마음을 쓰면,
배운 것처럼 마음 내는 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삶이 창조되어 집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하는 그 크기만큼 거꾸로
내 삶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이제 창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내 뜻대로 세상을 창조한다,
그것은 업이 아닙니까?
뭔가 내가 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이잖아요.
의지적인 행위가 곧 업(業)입니다.
의지적인 생각도 업(意業)이고,
의지적인 말(口業), 의지적인 행동(身業)도 업입니다.
아주 정확히 본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지만
다른 말로 내가 나의 업을 창조해내는 거예요.
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바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좋은 에너지, 좋은 삶을 창조해내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난 시간에
내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설법을 했던 내용은 뭐냐 하면
“기왕 세상을 창조할 거라면
못살고 고통 받고 부정적인 에너지 가지고 세상을 살지 말고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고
뭔가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창조하십시오.” 라는 방편으로써
그런 말씀을 드렸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이것이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한다면 본질은 뭔가?
방편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는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내안에서
자성부처님께서 본래적인 참나가
나를 창조해내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맡겨놓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가
내 삶을 창조하도록 완전히 나를 내맡겨놓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창조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본질적인 지혜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껍데기 의식인 에고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무명(無明)이다 보니까
나 잘되고자 하는
아상(我相)과 이기심에 기초한 세상을 창조한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방편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의업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아름답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창조된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창조에너지로 작업 해 놓은 것이
현재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지은 업들이 모여
그 업보라는 결과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라는 것은 곧,
불교적 표현으로 업을 변화시킴으로써
업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은 행위인데,
신구의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고,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마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
그 중에도 뿌리인 의업,
즉 생각을 어떻게 조작하고 다스리며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업의 결과인 업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潔薩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도
바로 이것입니다.
업을 내보내면
업보가 끌어당겨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건
내보내는 업에 있어요.
업을 내보내면
당연히 업보가 끌어당겨지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반대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끌어당겨지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했습니다.
불교는 나의 행위가 중심이고,
『시크릿』은 내가 받을 결과물이 중심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데서 조금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업을 잘 지어야
좋은 과보를 받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업을 잘 짓고
과보를 창조해 낼 것이냐’를 말씀드렸는데요,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업이라는 것이
이 세상, 즉 껍데기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만,
근원으로 들어가면
업이라는 것도 공(空)합니다.
우리가 선업, 악업이라고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라는 것도 공해요.
불교에서는 업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업이라는 공한 환영과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 업 자체를 뛰어넘고,
선악 자체를 뛰어넘어
어떻게 업을 넘어선 본질적인 곳에 가 닿을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의 핵심을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라는 의미인데요,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업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선악 업을 뛰어넘어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즉 업이라는 구속에서 조차
뛰어넘는 것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창조에너지를 가지고 좋은 업을 짓고,
우리가 마음을 잘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명예도 높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도 사고, 남들 돕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 된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으로
그냥 인생이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부자로 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를 창조하고 싶어서
부자를 창조할 수는 있겠지만
부자와 가난 그 양 극단을 뛰어넘어
부에도 가난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고, 명예도 높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그 차원에서는
『시크릿』의 가르침,
업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공부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 잡히고, 여여한,
우뚝 선 지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착하게 사는 방법은 됐을지언정
착하게 사는 것이 도(道)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제가 누군가에게 기분은 나쁘겠지만
꼭 해 주어야 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을 한 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그 사람하고 좋게 지내려면
날카로운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겠지만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당장은 조금 껄끄럽더라도
한 마디 해 줘야합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그것이 다는 아닌 겁니다.
선악을 뛰어넘고,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으며,
부와 가난을 뛰어넘는
더 큰 지혜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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