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 10:2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삶이라는 현성 공안
최근에 어떤 스님을 만났습니다. 승납이 30년 쯤 된 구참입니다.
그간 무자 화두를 참구했는데, 화두를 타파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안보이던 공안들이 그냥 바로바로 알아지더랍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스님은 화두가 타파되는 환희심에 몇몇 선지식들을 만났습니다.
전국에 알려진 큰스님도 있었습니다. 거량을 몇 차례 하고 난 뒤에,
그 스님들을 다 잡았다고 합니다.
만난 스님들 모두 제대로 깨달은 스님들이 아니랍니다.
자신이 하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론은 단촐했습니다.
나 혼자만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다.
***
스님은 같이 차를 마시던 스님들에게 이러저런 질문들을 합니다.
무(無)자 아느냐, 전삼삼 후삼삼(前三三後三三)을 아느냐,
곽시쌍부(槨示雙趺)의 의미를 아느냐... 스님들이 이렇다할만한 대답이 없자,
혼자서 기분좋게 웃으며 수행이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고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들이 수행하는 중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느니,
어느 선지식은 가짜 선지식이라느니, 꿈에서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줬다느니... 저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혼자서 말씀을 하시다가 또 다른 도리들을 언급하며
이거 아냐고 물어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에게 차 한잔 따른 찻잔을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스님, 차 맛이 이렇게 말끔한데, 언제까지 ‘아냐, 모르냐’
이런 질문을 계속 하실겁니까?”
***
이 공부를 하다보면, 공부가 어느 정도 익으면, 전혀 모르던 무언가가
쓰윽 하고 알아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공안들의 의미가 단박에 쓰윽 알아차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단지 하나만 알게 되는 게 아닙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공안들이
쓰윽 하고 알아차려집니다. 이럴 때 환희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드디어 공부의 결실이 맺어지고 있구나, 하고 자신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아는 걸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단지 드러내는 차원을 넘어서서 상대방을
점검하고 또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이 도리를 아느냐, 저 도리의 의미가 뭐냐... 그리고는 자신이 알게 된
도리와 맞지 않는다면, 그거 틀렸다고, 공부 다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그 스님은 자신이 굉장히 특별한 스님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참 비근한 경우입니다. ‘아냐, 모르냐’ 병에 빠진 겁니다.
동시에 ‘나는 안다, 너는 모른다’ 병에 빠진 겁니다.
선원에 있다 보니 수많은 수행자들을 만나봤고, 이런저런 경계를 접해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스님들이 제법 있기도 합니다.
네, 깨달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런 분들 대부분의 질문이
나는 이 도리를 안다, 너는 아느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상통하는 스님이 없으니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 유명한 선지식은 그거 제대로 된 공부 아니라며,
다시 화두잡고 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많은 경우 선지식을
비방하고 자신이 제대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갑니다.
그것이 몇 달을 갈 수도 있고, 혹 몇 년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깨달은 것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함에 의구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은 분명히 깨달았는데,
사람들이 도리어 자신을 멀리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위로하기도 합니다.
원래 이 최상승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나 혼자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 아는 사람이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혼자 고립되어 갑니다.
***
유튜브에 여러 공부인들이 자신들의 견처를 드러내며 많은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유튜브를 보지는 않는 편이지만, 언젠가 한번 우연찮게 들어본
몽지라는 선생님의 무문관 강독을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화두와 선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계셨고, 또 수행이 무엇이고,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탁월한 견해에 여러 번 감탄했습니다.
몇몇 강독을 들어보며, 제가 참 여러 가지로 많이 배웠습니다.
저에겐 참 좋은 선지식이십니다. 이 몽지 선생님은 ‘릴라’라는 인터넷 이름을
쓰는 부인과 함께 몽지릴라라는 선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강의를 하고,
매번의 강의를 인터넷에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 살펴보니 <원오심요>, <임제록>, <서장>, <진심직설> 등을 강의하고 계십니다.
스님들로서도 이해하기 어렵고, 또 스스로 확연해지지 않는 이상 강의하기는
더더욱 힘든 선어록들을 밝은 안목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두 선생님의 모습이 참 경외스럽습니다.
두 분 모두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어서, 제가 블로그를 구독해 두고 있습니다.
이런 안목을 갖추신 분들이 여러분 계시고, 또 비록 인터넷 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수많은 공부인들이 알게 모르게 널리 계실 겁니다.
절에만 수행자가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알다시피 수행에는
승속이 없고, 깨달음에는 절 안팎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공부된 사람이 절집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이렇게 승속을 불문하고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나섬에 의해 수행에 들어섰고,
나름의 성과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정말 그것이 제대로 된 수행인지, 혹 제대로 된 안목인지에 대한 평가는
좀 뒤로 물리고, 저는 이런 수행의 풍토가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
이 몽지 선생님이 무문관의 어떤 강독에선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하도 절감을 해서 메모까지 해두었습니다.
“지금의 삶에서 자유로워야지, 백년 전, 천년 전 해케묵은 공안의 수수께끼를
풀어놓고서, 지금 당장에는 불편하고 마음에 휘둘린다면,
그게 무슨 깨달음이고 그게 무슨 해탈이겠습니까.”
***
현성공안(現成公案: 혹 見成公案이라 칭하기도 합니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벽암록>에서 몇 차례, <원오어록>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말입니다.
현성공안에서 현(現, 見)은 지금 나타남을 뜻하고, 성(成)은 완성되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진리란 이미 완성되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수행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노력과 인위의 이전에 이미
지금 눈앞으로 훤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벽암록> 10칙에서의 평창을 보면, 목주스님은 웬 스님이 오는 것을 보자마자,
“지금 이 장소가 바로 그대로 드러난 공안이다.
그대에게 삼십 방망이를 때리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왜 목주스님은 스님을 보자마자 무슨 잘못이 있다고 삼십방을 운운하며
때린다는 말을 했을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이미 시작부터 어긋난 겁니다.
때리기 전, 말나오기 전, 생각하기 전에 확연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스님은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확연하고 정말로 명백하다면, 때려도 분명하고, 말나와도 분명하고,
생각해도 분명합니다. 오로지 명백함 뿐인데, 그 무슨 잘못된 일이 있겠습니까.
원오극근은 현성공안은 말하기 이전에 이미 드러나 있고, 근원?? 철저하여야
비로소 계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덕산(德山)은 문득 방을 들었고, 임제(臨濟)는 문득 할을 했으며,
목주(睦州)는 30방을 쳐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근원에 철저하게 계합하지 못하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의구심을 내며 할과 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찾을 겁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 이유를 찾기에,
그 때문에 틀렸습니다. 잘못된 일은 없습니다.
그 모든 일은 다 잘 된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명백하지 않아서 잘됨과 잘못됨을 판단하고,
그 이유를 찾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겁니다.
이런 경우에 방도 의문으로 먹히고, 할도 의문으로 먹히는 겁니다.
왜 때렸을까, 왜 소리칠까, 하고서요. 애초부터 의문으로 먹힐 수 없는
방과 할이, 저 쓸데없는 수작들이, 저 흙탕물과 같은 것들이,
명백하지 않은 까닭에, 의문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의문이
체계화되는 과정이 수행이라는 형식으로 자리잡히게 되는 겁니다.
***
현성공안에 대한 여러 주석들이며 해석들이 있지만, 여기선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눈앞으로 드러난 이 삶이 바로 현성공안입니다.
***
만일 어떤 이가 수행을 하고 난 뒤에 화두를 타파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화두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칩시다. 조주 무(無)자의 비밀한
뜻을 알고, 곽시쌍부를 알고, 또 남전참묘에서 조주의 뜻을 알고,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에서 마조의 뜻을 꿰뚫었다고 칩시다.
1600공안을 다 나름대로의 답으로 타파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지금의 삶에서 당장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게 도대체 뭡니까.
나만 깨달았다고 스스로를 드높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서운해하고, 수많은 현실적인 상황들과 문제들 앞에서
시비분별을 일삼으며 생각이며 감정이 왔다갔다 한다면 그게 무슨 깨달음입니까.
삶의 순간순간에 마음으로 인해서 휘둘린다면, 그 많은 고칙들을 풀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본래의 자유와 해탈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1600공안을 풀어도, 그 답을 얻었다고 해도 아무런 득이 없는 겁니다.
***
수행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 조금 경계가 난 사람들의 경우, ‘안다, 모른다’
이게 참 병입니다. 정말 큰 병입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
이건 마치 깨달았으니 부처니, 무명에 빠졌으니 중생이다, 라는 견해와 같습니다.
진정으로 깨달으면 깨달음이라는 게 없습니다. 우두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깨달음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착각으로 인해 억지로 나오게 된 것이지,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있는 무언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깨닫는다, 깨닫지 못했다, 라는 것도 아직까지 분별이어서, 이 분별을 떠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깨달음인 겁니다.
깨달음이 없을 적에, 깨달음 아닌 것 또한 없습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있다 없다’, ‘안다 모른다’, 이런 착각과
분별을 벗어나게 될 상태를 비로소 ‘명백함’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것도 할 수 없이 억지로 이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명백함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명백해야 합니다.
***
이 수행은 한 두번 신묘한 경계가 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저 역시 수많은 경계들을 많이 치렀습니다.
누군가는 감탄할 수도 있는 몇몇 경계들을 접하면서도, 누군가처럼 그걸
자랑하고 싶다기보다는, 정말 이게 끝인가, 정말 모든 게 분명한가,
정말 스스로 나에게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적에, ‘아니다’라는 결론이 손쉽게 내려졌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압니다. 정말 이것이냐고... 정말 자유롭냐고...
정말 깨달음이겠냐고... 정말 해탈이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압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이야말로, 그 솔직한 진심이야 말로 가장 큰 선지식입니다.
***
삶은 현성 공안입니다. 삶은 질문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답으로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질문으로 주어졌을 적에 그것은 공안(公案)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이미 확연한 답으로 드러난 것일 적에 그것은 현성(現成)
입니다. 삶이 이렇습니다. 삶이 질문이자 답인 겁니다.
질문과 답이 애초에 같습니다. ?樗막館? 같습니다.
이 수행의 목적은 답을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습니다.
공안은 이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모든 것으로 펼쳐진, 이 삶으로 집착없이
돌아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방편의 질문일 뿐이지, 그 자체로 고귀한
무엇이 아닙니다. 한 가지 질문에서 제대로 벗어나면 분별을 제대로 떠나는
것이어서, 1600가지 그 수많은 질문들을 빌미로 한 다양한 분별과 망상에서
동시에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이 질문을 벗어날 때를 두고, 눈 앞이 환하게 드러난다고도 했습니다.
수많은 선사들이 깨달으면 바로 눈 앞(目前)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사량분별하면 눈앞에 두고도 천리만리로 떨어진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렇기에 다만 그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 답이라는 건 애초부터 없습니다.
답을 구하려는 그 생각이야말로, 질문과 답이 따로 있다는 분별인 겁니다.
질문이며 답이라는 분별이 모두 무너졌을 적에는 명백함만이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명백함으로 삶이 펼쳐지는 겁니다.
***
무얼 알아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무얼 모른다고 해서 괴로운 것도 아닙니다.
알고 모르고, 깨닫고 못깨닫고, 중생이고 부처고,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만들어낸 분별입니다. 답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답을 얻어서 자유로운 게 아닙니다.
질문으로부터 해방되기에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 질문이라는 분별을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공안이라는 질문에는 개수가 있습니다. 다 합쳐봐야 1600여개 남짓입니다.
하지만 삶이라는 질문에는 개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하는 질문을 합치면, 수십만, 수백만이라고 해도 모자랍니다.
1600개 공안에 다 답을 하면 정말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공안은 단지 관문입니다. 이 질문을 멈추기 위한 관문인 겁니다.
질문하는 그 분별을 멈춤이, 답을 구하려는 그 갈증을 쉬는 것이야말로,
그 모든 공안이 가리키는, 가르친 적도 없고, 설명하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명명백백하게 온천하에 드러난 비밀한 가르침입니다.
***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무”
***
삶을 벗어나서, 삶을 초월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삶으로서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
저도 그렇고, 선 수행을 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가르침이기에,
몽지 선생님의 경책을 다시 한 번 언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삶에서 자유로워야지, 백년 전, 천년 전 해케묵은 공안의
수수께끼를 풀어놓고서, 지금 당장에는 불편하고 마음에 휘둘린다면,
그게 무슨 깨달음이고 그게 무슨 해탈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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