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마의 실천 |…… 혜천스님설교

2018. 6. 16. 22: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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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마의 실천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8월 22일


 

 

내일이 처서인데 여전히 덥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다르마의 실천'입니다.

 

지난주의 강론주제가 '전법하라'였는데, 여기서 전법이 바로 다르마(dharma)의 실천입니다. 다르마라고 하면 인도에서는 함의가 많습니다. 즉 수 십가지이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르마라고 하는 걸 좁혀서 구체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다르마의 실천은 '단월檀越)'을 뜻합니다. 이것을 중국에서 보시布施로 번역하였으며, 요새는 나눔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실질적으로 단월이라고 하는 자체에 나눔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눔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보시는 나눔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인도의 사상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이 있습니다. 하늘의 신인 천신과 지상의 신인 인신이 그것입니다. 천신에게 올리는 제물이 공물 또는 공양입니다. 그렇다면 인신은 어떤 사람을 뜻하느냐? 인도 바라문의 사제들을 뜻합니다. 바라문은 사람의 형상을 한 신, 즉 인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인신에게 올려지는 걸 보시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 바라문의 성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불교는 이 용어를 그대로 갖다 쓴 것입니다.

 

불교에서 보시는 '시여施與되는 것'을 뜻합니다. 시여란 나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눔이란 내가 가진 것 중 일정 부분을 남에게 주는 것이지만, 시여란 내가 가진 것 전부를 주는 것입니다.

 

자타카에 속하는 장수경을 보면, 고대 인도의 장수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수왕은 백성을 평화롭게 살 수 있게 좋은 정치를 펴는 왕이었습니다. 좋은 정치가 무엇이냐면,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나라를 꿈꾸죠. 이명박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부자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부자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는 의문점이 따르죠. 궁극적으로 부처님이 꿈꾸는 사회는 좋은 사회입니다. 부처님이 꿈꾸는 인간사회는 좋은 사회입니다. 마아~ 나는 이것을 붓다의 꿈이라 봅니다. 백범 김구선생도 부강한 나라를 원치 않는다고 했죠. 아름다운 나라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장수왕은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좋은 사회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웃 나라의 왕은 포악한 왕이었습니다. 여기서 포악하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채찍이나 칼로 다스리는 왕이 포악한가요? 여기서 포악한 왕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포악한 왕이란 팽창주의 정책을 쓰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높이 받드는 광개토왕 역시 팽창주의 정책을 쓴 왕입니다.  광개토왕, 알랙산더 대왕, 징기스칸, 나폴레옹 등이 모두 팽창주의 정책을 쓴 지도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왕을 동경하죠. 게다가 그런 나라의 국민이고 싶어합니다. 현대의 미국은 팽창주의 정책을 쓰는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전세계를 그들의 속주로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까? 근래에 들어서는 중국도 팽창주의 정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미얀마나 북한이 중국의 하나의 성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죠.

 

팽창주의 정책은 언제 어디서나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정책을 쓰는 나라들을 동경하죠. 지난 정부의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개념도, 황석영씨가 주창한 몽골리안 루트도 팽창주의 정책입니다. 올해는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였던지 100년 되는 해입니다. 일본의 조선 지배도 그런 의미에서는 비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본도 근대에 팽창주의 정책을 쓴 것이며, 이토오 히로부미가 그 선봉장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팽창주의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 이라크에 군대가 파병되고, 그 파병된 군대가 베트남에선 양민을 죽입니다.

 

우리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기만이죠. 우리의 군대가 침략군으로 간 것이지, 그들이 원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본에 사과를 요구합니다. 일본 역시 퍙창주의 정책을 폈을 뿐입니다.  장수왕의 이웃 나라 왕이 포악하다는 뜻은 팽창주의 정책을 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는 진나라 시황제는 결과적으로 여섯 나라를 멸망시킨 것 아닙니까? 여섯 나라의 고유의 문화와 정책이 파괴된 것입니다. 그리고 진나라 것으로 통일된 것입니다. 나머지 여섯 나라의 백성들은 아마 힘들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대, 패전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국민들은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팽창주의 정책을 긍정하고 동경합니다. 다만 내가 피해를 입었을 때만 비판하죠.

 

장수왕의 이웃 나라 왕이 군사를 일으켜 장수왕의 나라를 침범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의 공통점은 잘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직전의 통신사였던 황윤길이 머지 않아 일본이 침공할 거라고 얘기했죠. 그러나 남인들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죠. 그러나 결국 일본이 침공했죠.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도 패망할 때, 싸울 건지 말것인지 망설이죠. 장수왕 역시 싸우려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무엇입니까? 백성을 위한 전쟁이란 없습니다. 국민을 위한 전쟁이란 없습니다. 요즘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방한 중인데, 그의 강연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하죠. 미국인인 그가 이라크 전쟁을 '부자들을 위한 전쟁에 가난한 자들의 전투'리고 정의합니다. 부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가난한 자들이 피를 흘린다는 것입니다. 국민을 위한 전쟁이란 없습니다.  

 

장수왕은 스스로 왕위에 물러나서 태자를 데리고 자취를 감춥니다. 이웃 나라의 왕은 무혈입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죠. 적국의 왕의 시신을 못 본 것은 이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뜻합니다. 점령군의 왕은 도망간 왕을 잡아들이라는 포고문을 붙입니다. 그리고는 도망간 왕을 숨길까봐 백성들을 닥달하게 되죠. 망국의 왕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슬픕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자기 일에 책임을 지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뒷뜰에 목을 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죠. 조선의 왕 고종만이 비열한 삶을 이어가죠.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묘호가 왜 순종인지 아세요? 순순히 조선을 일본의 천황에게 바쳤다고 해서 일본이 붙여준 묘호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묘호는 왜 공양왕인지 아세요? 공손하게 받들어 왕위를 이성계에게 바쳤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숭정제는 양심가였습니다. 그는 명나라를 살리려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죠. 대한민국의 국사책은 바뀌어야 합니다. 국사책에서 고종의 책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 조선 패망의 책임을 대원군에게 뒤집어 씌우느냐 말입니다. 

 

전쟁이든 왕권투쟁이든 왕이 죽어 시신을 봐야 그것이 끝납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성조가 북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남경에 있던 조카이자 황제인 건문제를 쫓아냅니다. 건문제 황비의 시신은 찾았는데, 건문제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집요할 정도로 추쇄합니다. 끝내 건문제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양자강을 타고 호남으로 탈출해 해로를 통해 탈출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영락제가 건문제를 잡기 위해  장군 '정허(鄭和)'는 7차에 걸쳐 아프리카에까지 닿는 대원정을 하였는데, 정허는 1차 원정(1405년) 때에 길이 약 137m, 너비 약 56m의 대형선박이 포함된 함선 62척에 총 승무원 2만7천800명인 함대로 유럽의 원정보다 70년 정도 앞선 항로 개척입니다. 남정로라는 해로가 개척된 이유가 건문제를 잡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환관인 정허는 윈난(雲南)성의 이슬람 민족 출신으로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아 1405년 장쑤(江蘇)성 타이창(太倉)에서 첫 항해에 나선 이후 1433년까지 28년 동안 7차례 항해를 떠나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37개 국가를 방문합니다.어쨌든 장수왕을 잡으려 군사들이 집집마다 수색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전두환 때 광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시위자들을 찾는다고 군인들이 뒤지고 다녔죠. 

 

그러자 왕이 스스로 나섰죠. 자기 아들은 피신시키고, 장수왕은 잡혀서 순순히 죽죠. 그러면서 군중 속에 있는 자기 아들인 장생태자을 향해 '원한으로 원한을 갚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아버지 장수왕과 아들 장생태자는 입장이 다릅니다. 즉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신분을 속인 채 허드렛 일을 하는 궁중의 일꾼으로 변신합니다. 그리고는 서서히 능력을 발휘해 왕의 눈에 띄게 됩니다. 인물도 좋고 똑똑한 그를 보자 이를 안타까워한 왕이 근시로 명합니다. 요새 직책으로 하면, 비서관이죠. 그런데 이 왕은 사냥을 즐깁니다. 예전에는 군사들을 조련하기 위해 반드시 사냥을 합니다. 사냥은 사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군사들의 체력단련이 목적입니다. 군사조련의 필수과목입니다. 사도세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문신들이 이를 싫어합니다. 이런 무신기질 때문에 아버지 영조와도 충돌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장생태자가 그걸 노렸죠. 가장 가까이서 왕의 말고삐를 잡고 사냥에 나섭니다. 그는 짐승을 추격할 때, 의도적으로 가까운 근시 몇 명만을 배치합니다. 그리고는 사슴을 발견해 왕이 추격에 나서자 근시들을 따돌리고 왕과 자기만이 남게 됩니다. 장생은 원래 그 나라 사람이니 사냥터에 익숙해 말을 이리저리 몰아 몰아 왕을 게속해 뺑뺑이를 돌립니다. 그러자 왕이 지칩니다. 시종이 사냥 중에 길을 일었다는데 어쩔겨? 배가 고파 오겠죠. 임금도 배 고프면 별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이 배고픔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죠. "내가 너무 힘들어 더는 갈 수 없다" 그러자 장생태자는 "전하! 제 무릎을 베고 한 잠 주무시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왕이 잠든 사이 칼을 빼서 그의 목을 찌르려고 하죠. 그런데 그 때 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하던 말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 왕을 죽이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왕이 벌떡 일어납니다. "내가 방금 꿈을 꾸었는데, 장생이 나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장생이 이와 같이 말하죠. "내가 바로 당신이 죽인 장수왕의 아들 장생태자이다. 내가 당신을 죽이려 신분을 속이고 오늘날까지 모든 걸 참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선왕이 남긴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는 말이 생각 나 차마 당신을 죽이지 못하였으니, 이제 말을 타십시요. 그리고 저쪽 방향으로 가면 사냥을 함께 온 근시들과 군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서로 각자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자 왕이 "내가 잘 못했다. 나와 함께 가자"며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리고 왕은 돌아와 자기의 딸과 장생을 혼인시키고 그가 빼앗았던 모든 구토를 돌려 줍니다.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봐야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이해를 위해서는 부처님의 과거 이야기인 <자타카>를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자타카>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장수왕의 행위는 시여의 행위입니다. 시여란 어떠한 전제 조건도 없습니다. 장수왕은 어떤 조건도 없이 백성과 국토를 이웃왕에게 주었습니다. 포악한 이웃나라 왕이 장수왕의 국토를 점령했다가 장생에게 그 땅을 돌려주고, 딸과 혼인시킨 것 역시 시여입니다. 시여는 나의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장수왕이 목숨까지 준 것은 시여행위입니다. 이웃왕이 장생태자에게 한 행위 역시 자기 자신의 생명조차 장생에게 속해있다는 걸 보이는 시여행위입니다. 그러나 시여를 이것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난 강론에서 얘기했다시피, 부처님이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기 생명을 주죠. 이것도 시여행위입니다. 시여는 내 가장 소중한 것을 어떠한 조건도 없이 순수하게 증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여는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거래되죠. 거래란 교환의 원리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거래가 작동되죠. 시여는 거래 원리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자타카>의 또 다른 이야기인 매와 비둘기의 이야기에서, 그 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처님이 저울에 올라가는 것은 시여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례들은 바로 부처님은 일체 중생들에게 남김없이, 거래와 교환의 원리가 아닌, 조건없이 중생에게 시여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게 바로 부처님이 행하는 다르마의 실천입니다. 다르마를 행하기때문에 부처인 것입니다. 번개처럼 갑자기 생각이 확 틔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붓다인 이유는 다르마의 실천에 의해 모든 중생들에게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후기 불교에 오면, 삼륜청정관(三輪淸淨觀)이 됩니다. 즉 보시하는 자와 보시받는 자보시하는 물건이 모두 순수(=청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조건도 붙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어떠한 교환의 원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사회는 등가의 원리가 작동하죠. 즉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것이 등가의 원리입니다. 반드시 댓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이유없이 누구에게 거액을 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댓가가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은 뇌물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댓가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시러배가 몇 억을 주면서 어찌 댓가성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변호사 한 분이 노쇠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식에게 수 백억대의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이 아버지를 안 모시게 되자, 이 변호사 출신의 노인은 화가 납니다. 참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자기 생각, 습관입니다. 왕년의 변호사 실력을 발휘해 그 아버지가 '내 재산을 돌리도"라며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게 신문에 났습니다.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이런 청구 소송이 처음인데다가, 그 당사자가 유명한 변호사이며, 그 아들 또한 대학교수인지라 신문에 난 것입니다. 이런  대부분의 경우에는 일단 재산을 물려주고 나면, 푸대접을 받아도 참지 자식을 상대로 소송하지 않아왔던 것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부모-자식간에도 등가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자식이 어렸을 때는 원하는 걸 조건없이 들어주죠. 그 때는 순수합니다. 등가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죠. 그러나 아이가 성장해 재산을 물려주면서부터 등가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내가 어려서 조건없이 너를 양육했으니, 너도 조건없이 나를 부양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친구가 밥을 열번 사면 한 번 정도는 내가 사야 그 친구가 계속 만나줍니다. 안 그러면 만나주지 않습니다. 친구관계가 깨어집니다. 거기에는 등가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등가의 원리는 교환의 원리, 거래의 원리입니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자타카>에 나온 장수왕 이야기, 부처님이 암호랑이와 그 새끼를 살린  장소라는 네팔에 가면 그 사원이 성지가 되어있습니다. 매와 비둘기의 비대칭관계를 대칭으로 맞추기 위해 부처님이 저울에 오르는 것은 시여입니다. 시여는 어떤 등가원리가 작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시여될 뿐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에 행한 행위는 시여입니다. 그러나 중생과 중생의 관계는 등가의 원리입니다. 솔직한 얘기로 이런 일도 있습니다. 며느리가 둘이 있는데, 큰 며느리는 나와 살죠. 작은 며느리는 나와 살지 않지만 어쩌다 한 번 오는데, 중요한 건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죠. 모시고 시장에가 옷을 사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작은 며느리가 더 이쁩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매일 밥하고 발래하는 큰 며느리는 하나도 안 이쁩니다. 큰며느리 입장에서는 억울하죠. 대하는 게 벌써 틀립니다. 자기에게는 자갈밭에 포니 자동차가 달리듯 하고, 동서에게는 대하는 말이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합니다. 인간 사회는 부모 자식간에도 등가의 원리가 작용합니다. 그래서 인간사회입니다. 

 

요새는 애완동물이라고 하면,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안 씁니다. 대신 반려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문화인 취급을 받죠. 고양이를 길러보면, 이 동물이 개보다 야생성이 덜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양이에게는 야생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양이도 자기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이뻐해 주면, 와서 비비고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괄세하면 뱀을 잡아다가 이불에 넣기도 합니다. 내가 예전에 본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은 스님이 기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벌써 울음소리도 틀려집니다. 야옹 야옹하지 않습니다. 특유의 울음 소리를 내는데 듣기 좋습니다. 주인은 이 소리를 들으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니다. 고양이도 그럽니다.

 

꾀꼬리의 평상시 울음은 거슬립니다. 그러나 듣기 좋게 울 때는  짝짓기 하려고 암컷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환장할 지경으로 좋습니다. 가끔 한번씩 들려주지 허구헌 날 들려주지 않습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은 안 아파도 가끔 병원에 입원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이 쫓아와 걱정을 해줍니다. 안 그러면 '우리 보모는 원래 건강해'라고 신경을 안써 줍니다. 고양이조차도 자기에게 애정을 가지고 돌봐주는 사람에게 친밀감을 나타내죠. 우리가 동물을 사랑할 때 거기에는 등가원리가 없습니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획하고 지나갔다고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등가원리가 적용되죠. 

 

그런데 부처님은 중생에 대해 등가원리가 없습니다. 그저 시여될 뿐입니다. 이것은 교환의 원리, 등가의 원리가 아닙니다. 단지 모든 것이 부처님에게서 중생에게로 흐르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죠. 나는 초하루나 보름이 되면 노불자님께 사기를 칩니다. 즉 거짓말을 합니다. '기도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잘에 들어가 보면 부처님의 시여행위는 등가원리가 아닙니다. 내가 기도해야 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등가 원리이자 교환 원리입니다. 만약 기도하는 것을 이루어지게 해준다면, 그 분은 붓다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든, 기도하지 않든 누구에게나 시여가 주어지고, 누구에게나 똑 같은 등가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다르마의 실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내가 아는 누구는 매일 치부책을 씁니다. 자식에게 용돈 주는 것을 적는다는 것입니다. 택시비, 공책값 등등... 그래서 '거사님 그걸  왜 적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말을 안들으면, 이걸 꺼내 빚 계산을 할려고 그런답니다. 물론 농담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농반진반이라고 그걸 적는 마음에는 등가의 원리가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적어 두십시요. 구두로 주고 받는 것은 법적으로 증거가 안됩니다. 

 

다르마의 실천은 시여입니다. 시여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시여된다는 것입니다. 단월, 보시, 나눔에는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본래의 의미가 굉장히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넓혀 나가야지, 축소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 생각이 넓혀 나가야지 좁혀지고 오그라 들어서는 안됩니다. <자타카>에서 장수왕의 그 이야기는 시여입니다. 국토를 넘겨주고, 자기의 생명을 비롯해 모든 것을 어떤 교환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고 증여합니다. 그 반대 편의 이웃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수왕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행위가 시여행위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즉 부처님의 행위는 시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르마의 실천입니다. 여기에는 등가나 교환의 원리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중생에게 시여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데, 소나무가 이쁘다고 물을 더 주고, 잣나무가 밉다고 물을 덜 주고 하지 않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차별 없이 모두를 적셔주는 것이 부처님의 시여입니다. 여기서 그가 선한 행위를 했느냐 아니냐는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시여의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시여하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다르마의 법칙에 따라 몸만 담그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처님의 시여를 받는 것입니다. 시여 속에 있는자, 그것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더운데 다음 주는 시원해 지겠지요. 몇 달 후에는 법당이 춥다는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항상 법회에 참석하시는 선우님들 행복하시고, 그리고 그 행복한 미소가 온 가족에게 물들고,  차별없이 적셔주듯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 박혜경 - Rain (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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