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에 관한 부처님의 답변

2018. 6. 16. 22: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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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에 관한 부처님의 답변


부처님의 신의 존재에 관한 답변

어느 이른 아침 붓다가 아침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신이 있습니까 ?

붓다는 그의 눈을 잠시 들여다 보며 말했다.

"아니다. 신은 절대로 없다. 결단코 있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엉터리 같은 생각을 치워버려라."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붓다를 항상 따라다니는 아난다에게마저 붓다의 방금전

그 대답은 너무 노골적이고 잔인하게 보였다.그러나 그가 붓다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붓다의 얼굴은 너무나 자비스러웠다.

같은 날 오후 다른 사람이 와서 신은 존재하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신은 있다. 신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찾아보라."

아난다는 매우 당황했다. 아침에 붓다가 말한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묻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해질 무렵에 찾아왔다.

붓다는 나무 밑에 앉아 저녁 노을의 아름다운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람이 물었다.

"신은 있습니까?"

붓다는 단순이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사람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잠시 침묵속에 앉아 있다가

어두워질 무렵 그 남자가 일어났다. 해가 졌다. 그는 붓다의 발을 만져주며 말했다.

"응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하고는 떠나갔다.

이제 아난다는 피가 끌어올랐다. 거기에 아무도 없을 때 아난다는 물었다.

"당신께서 대답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오늘밤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날, 같은 질문에 당신께서는 세가지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없다고 하였고,

두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에게는 당신께서는 소박한 사랑으로 그렇게 앉아

눈을 감으라고 몸짓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깊은 침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을 만졌고

또한 당신의 응답에 고마움까지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기에 있었을 때, 당신께서는 그에게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어떤 응답도 네게 주어진 것은 없다.

왜 네가 어리둥절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질문이었고, 나의 응답이었다.

너는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아난다는 말했다.

"저는 귀먹어리가 아닙니다. 저는 거기에 있었고 단지 듣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세가지의 응답이 저를 계속 혼란하게 합니다. "

붓다가 말했다.

" 그 첫번째 사람은 유신론자였다. 그는 정말 묻기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의 믿음을 내가 뒷받침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을 믿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붓다 또한 믿는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매우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의 관념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학자였다. 경전을 둘둘말아 외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속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망치처럼 잔인하고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들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충격이 필요했다.

나는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누구의 믿음도 뒷받침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믿음은 그릇된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사람은 무신론자였다. 그 역시 학자였다.

그는 모든 종류의 관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첫번째 사람과는 정반대 였을 뿐이다. 그 또한 같은 목적으로 왔었다.

그 둘은 서로 용납하지 않았으며 서로 적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같았다.

그는 나에게 그의 불신앙을 옹호받고자 했다. 내가 그에게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오직 신만이 있을뿐 다른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그의 불신앙을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참된 탐구자였다. 그는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을 원했다. 그는 질문하러 온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관념도 편견도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다면 문을 열고자 왔었다. 그는 나에게 답을 받고자 왔다.

그는 지대한 신뢰감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드러내줄 것을 원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그에게 내옆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맞았습니다. 당신께서 옳았습니다. 무엇인가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깊은 침묵속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언젠가 무엇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붓다와 같은 침묵속에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가

어마어마하게 진귀한 것이 일어날 것이다. 그의 침묵에는 전염성이 있다.

만약 그대가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의 침묵이 그대의 존재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올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욕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그대는 순결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먼지가 그대의 거울에서

사라지게 될것이다. 그대의 눈은 선명해 질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 ······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 대답도 내 주지 않았지만 그는 해답을 받았다.

그의 침묵속에서 모든 해답중의 해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절하면

발을 만지면서 고마워하였던 것이다.



♧ 불교의 핵심 사상 ♧

               월호 스님


첫째 불교는 자력신앙 인가? 타력신앙 인가?

자각신앙 인가?

불교는 자각신앙 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깨달을 각(覺)자.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되는 것처럼,
자력이든 타력이든 자각에만 이르면 되는 겁니다.


자각각타 (自覺覺他),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해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불교의 신앙이죠.

마치 왼 손과 오른 손이 만나서 박수 소리가 나듯이,
자력도 충실하고 타력도 충실 할 때,
손쉽게 자각각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불교는 한마디로 자력과 타력을 겸해서 쓴다,
이겁니다.


두 번째 불교는 무신론 인가 ? 유신론 인가?

비신론 인가?

불교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유신론 처럼
나의 주인님으로,
주님으로 섬기고
나는 당신의 종 입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안 합니다.

그래서 신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신도 역시 하나의 정신적인 뛰어난 존재일

뿐이지,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제자다.

또 나도 부처님의 제자다.

그래서 서로 사이좋게 도반으로 지내면 되는 것이지,
굳이 주님으로 섬기지 않는다.

그래서 비신론 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여 봤습니다.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주인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닐 비(非)자, 비신론 이다.


그 다음에 불교는 성선설 인가? 성악설 인가?

불교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 하는 성선설도
아니고,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하는 성악설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성공설 (性空說) 이라고 제가 이름을 또 붙여 봤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하다는 것은 비어 있다는 의미죠.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는 거죠.


몸과 마음이 공하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존재로든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창조설 입니다.


이 성공설의 공이 바로
색즉시공 이자 공즉시색
이라고 하는 거죠.

눈에 보이는 세계는 모두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게 바로 색즉시공의 도리 입니다.

그러나 공즉시색 까지 가야 됩니다.
반 바퀴를 더 돌아야 제 자리로 돌아오죠.

공즉시색은 뭐냐?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존재로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창조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공사상은
진공은 묘유다 라고
하는 것이죠.

참다운 공은 묘하게 존재하는 것이지,
비어 있음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고
고정된 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어 갈 수 있다,
아주 무한한 자기 창조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부처도 될 수 있고,
보살도 될 수 있다.
신도 될 수 있고,
인간도
될 수 있으며,
축생도 될 수 있다.

내가 선택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백지 수표
이것을 잘 활용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요 세 가지만 잘 기억하고 있어도
불교의 핵심사상을 잘 파악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불교는 자력신앙도 아니고 타력신앙도 아니다.
자각각타 신앙 이다.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것,

자력과 타력을 같이 쓴다.


불교는 무신론도 아니고 유신론도 아니고
비신론 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나의 주인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내 주인은 나다.라고 하는 거죠.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 이다.

그러니까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거죠.


불교는 성선설도 아니고
성악설도 아니다.
성공설 이다.


이 세 가지를 잘 유념해서 기억해 주시며는
불교의 근본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음악/When You Told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