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 혜천스님설교

2018. 10. 6. 12: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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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5년 4월 3일


 


부처님의 재가 신도중 유력한 사람으로 남자로는 빔비사라왕,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 아나타빈디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여자재가 신자로는  이시카라 , 마니가 대표적입니다. 

 

오늘은 빠세나디왕 얘기를 하겠습니다. 빠세나디왕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처님을 찾아뵙고, 부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절을 합니다. "붓다시여, 저 빠세나디입니다." 절한다는 것은 부처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이 빠세나디왕을 모를까봐 빠세나디왕이 부처님에게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걸 뜻합니다.

 

언제나, 즉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처님을 찾아 이야기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부처님! 저는 요새 참 기쁩니다. 형언할 수 없이 기쁩니다. 부처님! 저는 요새 참 슬픕니다. 마이 슬픕니다. 울고 싶습니다. 부처님! 저는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남녁에서는 매화가 화들짝 핀다지만, 제 가슴 속에는 보리고개가 넘고 있습니다. 부처님! 저는 요새 아들 장가보내고, 덩그러니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처님! 저는 딸을 시집보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바쁩니다. 집에 와보면 집이 마치 새끼 떠난 빈둥지 같습니다. 리모컨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댑니다. 예전에는 코메디 프로를 보면 한마디에도 빵하고 터졌는데, 요즘은 그 프로 다봐도 웃어지질 않습니다. 집에 먹을 것도 없고 해서, 라면 하나를 찾아 끓여먹는데 눈물이 납니다. 아내가 끓여주지 않아서 서러워서일까요, 매워서일까요? 부처님! 저는 요새 슬픕니다. 지난 날 아내와 벗꽃 구경을 할때는 벗꽃 휘날리는 모습에 탄성이 났지만, 오늘 그곳을 걸었지만, 기쁨의 탄성보다는 눈물이 납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왜 그럴까요? 언제나 부처님을 찾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빠세나디 왕은 항상 그랬습니다.

 

빠세나디왕이 어느 날 전쟁터에 나갔죠. 우리나라 왕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습니다. 죽을까봐 겁이 나서 그런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나라 왕들과 귀족은 지 한 몸 보존하기에 바빠 도망가고 숨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인도의 전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전쟁터에 나가 칼을 맞고 죽어 나라가 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조만 망하는 것이지 백성은 그대로입니다. 일반 백성은 누가 왕을 하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빠세나디왕이 전쟁에 나간 어느 날,  밤이 깊어져서 자려고 했는데 군사감독관이 따라갔습니다. 이시닷타라는 감독관과 또 다른 감독 1명이 왕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 부처님이 계신 곳을 알아보고 나서 그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 왕이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뻗고 잡니다. 그러자 왕이 말합니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 저들이 가지고 있는 부, 저들이 가지고 있는 수레가 모두 내가 준 것인데, 날 가볍게 여기고 부처님을 높이 여겨, 머리는 부처님 계신 곳을 향해 두고, 씻지 않아 냄새나는 발을 내게로 두고 자는 구나.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참으로 부럽구나" 이것은 빠세나디왕이 부처님께 직접 말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살다 보면,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좋은 일만 있다면, 그걸 좋은 일이라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자로 살고 싶어 합니다. 최영 장군이 "황금을 돌같이 보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런데 최영장군은 당시 최고 권력자이자 권신입니다. 최영 장군이 황금을 돌같이 본다고 해서 그의 삶이 불행질 리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이미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황금을 돌같이 여기라'는 말은 그저 책 속에나 있는 얘기일 뿐입니다. 그가 얼마나 청렴할까요? 그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그의 딸은 왕비였습니다. 그는 굳이 황금을 창고에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력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85년도인가 제가 알고 있는 스님 이야기입니다. 그 스님이 롯데호텔에서 누굴 만나기 위해서 갈때, 제가 들러리로 갔습니다. 호텔 앞에 차를 세웠더니 도어맨이 쫓아와서는 '죄송하지만 차를 빼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긴 주차장이 아닌가? 왜 차를 세울 수 없다는 말인가?' 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도어맨은 여기에 주차하면 자기가 혼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롯데호텔 정문앞은 최소한 당시에 국내차로는 최고급이라 할만한 그랜저 정도는 되어야 주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쩝니까? 도어맨이 짤린다는데 거기에 차를 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구석데기에다 차를 세우고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만약 가을에 나무의 단풍이 떨어지듯이 매일 그렇게 황금이 떨어지면, 어느 누구도 황금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황금이 지겨워질 것입니다. '황금이 또 왔네. 언제 저걸 다 쓸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을 단풍이 들면, 은행잎이라도 날리면 사진을 찍으며 좋아합니다. 제가 금산사에 오래도록 머무르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긴 마당이 넓기로 유명합니다. 마당에서 일주문까지 빗자루로 쓰는게 사품입니다. 마당을 쓸고, 일주문까지 쓸고 나면, 허리가 마이 아파. 그 정도 되면 은행잎이 지겨워집니다. 서리라도 와서 한꺼번에 확떨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관광객은 탄성을 지르죠.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 말입니다. 매일 쓰는 사람은 힘듭니다. 눈은 더 힘듭니다. 좋은 일도 매일 그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아들을 군대 보내고 나면, 입었던 옷이 소포로 부처져 옵니다. 요샌 택배로 오죠. 그러면 애틋한 마음에 엄마가 울죠. 그런데 아들이 자대 배치를 받고, 휴가를 나오게 됩니다. 휴가도 어쩌다 나와야 반갑습니다. 휴가와 외출이 잦아지면, '고만 나오면 안돼냐?'라고 생각합니다. 말년 병장이 되어 주말마다 나오면, 반가운게 아니라 짜증을 냅니다. 그래서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그랬습니다. 그 좋다고 하는 것 역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귀해야 대접을 받습니다. 귀하지 않은 것은 대접받을 수 없습니다.아무리 황금이 좋아도 귀하지 않으면 황금이 아닙니다. 대접받지 못합니다.

 

빠세나다왕은 이시닷타에게 감동했습니다. 왜 감동했을까요? 모든 것을 자기가 주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박부용입니다. 제가 최ㅇㅇ입니다. 제가 김영순입니다. 빠세나디왕이 하듯이 말입니다. 제가 용정옥입니다. 제가 김인자입니다. 빠세나디왕은 언제나 부처님을 찾아뵙고, 발에 입 맞추고"제가 빠세나디 왕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1년 365일 행복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년 365일 불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덜 행복할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더 행복하기 위해서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부처님! 제가 왔습니다. 부처님 행복하시죠. 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일본 영화 중에 우리나라에 개봉된 적도 있는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오겡끼 데스까"라고 외칩니다. '겡끼'는 한문으로 원기, '오'는 존경을 나타내는 접두사로, '오겡끼데스까'는 '편안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의 뜻입니다. 그 여배우는 항상 외치죠. 기도란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 편안하시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집안은 가을 무서리 맞은 국화처럼 생기가 없습니다." 기도는 무엇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달라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응병여약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병을 보아 알맞은 약을 주어 치료한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많이 가는 사람은 본인이 진단하고 처방을 내립니다. 의사에게  '여기가 아프니, 그 약을 주세요'라고 하죠. 그저 약을 타려니까 의사의 싸인이 필요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거기가 아프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떠한 현상때문에 나타나는 부수적인 현상입니다"라고 제대로 진단해 말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여기가 아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나가면서 말합니다. "돌팔이 같으니라구" 그러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닙니다. 부처님이 병을 알아, 그 사람에게 알맞은 약을 주듯, 부처님이 각자에 알맞은 처방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빠세나디왕은 "저 빠세나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이 빠세나다 왕을 몰라 볼까봐 자기 이름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이 믿음이고 기도입니다. 즉 나 자신을 알리는 것, 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믿음, 기도입니다. 우리는 존재감이 있어야 합니다. 존재감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 존재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나 때문에 존재한다는 미친 존재감이 있어야 합니다. 미친 존재감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욕 먹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와 비슷하면 사람들이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내가 월등하면, 어느 누구도 욕을 하지 못합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내가 만만해 욕을 하고, 맞짱을 뜨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힘앞에는 누구나 무릎을 꿇습니다. 미친 존재감이 있으면,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고종 때 우의정을 지닌 박규수는 철종실록을 편찬할 때, 추사 김정희의 졸기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완공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대놓고 비난할 수 없었다" 왜 비난하지 못했을까요? 추사 김정희가 가지고 있는 안목을 어느 누구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친구, 정적들이 조당에 모여 학문과 예술을 얘기합니다. 추사가 정리하죠. "그거 내가 중국가서 봤거든" "그거 내가 중국에서 봤는데 말이야" 어느 누구도 그의 안목을 넘어설 수 없어 그를 비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감이 없으면, 그는 살아있으나 죽은 목숨입니다. 빠세나다왕이 부처님을 찾아 뵙고, 자기 존재감을 알리듯,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염주를 굴린다고 해서, 마음이 온데 다 가있고 앉아 있는 것이 지겹고 그러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기쁜 것이 기도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항상 부처님께 자신을 알리는 것, 그게 기도입니다. 마치 빠세나다왕이 했던 것처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번 주 강론은 좀 특별했다. 평상시 일요법회에다가 초하루법회, 영가의식까지 세 가지가 함께 이루어졌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일요법회와 달리 불교적 전통에 따라 공양의식과 더불어 법회가 있다. 그래서 이번 법회는 사실 세 부류의 신자들이 함께하는 법회가 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주 강론 주제 역시 좀 소프트하다. 강연주제를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으므로,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임의로 붙여봤다. 소프트하다고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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