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굴리말라의 행복'|…… 혜천스님설교

2018. 10. 13. 11:2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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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굴리말라의 행복'  



혜천스님 설법 2555년 4월 17일.



 

오늘은 보름과 겹쳐있는 관계로 법회 시간을 한시간 늦추었습니다. 오늘의 강연 주제는 '앙굴리말라의 행복'입니다. 붓다가 계신 시대에 '앙굴리말라'라는 악명높은 도적의 우두머리가 있었습니다. 이 집단은 너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서 국가도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두목 이름이 앙굴리말라가 된 것은 그가 사람을 죽이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본명은 무언지 모릅니다. 다만 세상사람들은 그를 부를때 앙굴리말라라고 불렀습니다. 사람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를 만들어 주렁주렁 걸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울면 어른들이 '저기 앙굴리말라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멈추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적 '저기 순사가 온다'하였지요.

 

당시 임금이었던 빠사나비왕에게도 앙굴리말라는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사실 잡기 힘든 일당을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습니다. 미국은 빈라덴 일당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붓다가 앙굴리말라가 있는 숲으로 들어가십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붓다는 담담하게 그 숲으로 들어가십니다. 때마침 앙굴리말라는 맛난 점심을 먹고 하품을 하고 있다가, 숲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문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때가, 내가 심심할까봐 일케 재밋거리를 주는구나'하고는 칼을 들고 붓다에게로 짓쳐 들어갑니다. 이를 본 부처님은 뒤로 돌아 서서 걸어 갑니다. 앙굴리말라는 사력을 다해 쫒아갔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아무리 앙굴리말라가 뛰어가도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화가 난 앙굴리말라가 '거기 서라! 사문아'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온화한 목소리로 "나는 이렇게 멈춰 있는데 너는 멈추지 못하는구나"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순간 앙굴리말라에게는 이 말씀이 천둥처럼 다가 왔습니다. 그러자 앙굴리말라는 무릎을 꿇고 않아 '제발 저를 멈추게 해주십시오' 하자 부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하시고 제자로 받아 주셨습니다. 훗날 머지않아 앙굴리말라는 성자의 대열에 올라 섭니다. 도적의 괴수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았은 자가 붓다의 제자가 되고 성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될 일이랍니까. 어떻게 그런 인간이 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린 항상 전생에 죄를 지어서 지금 이토록 괴롭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지난 날의 과보는 지난 날의 이야기일뿐입니다.

 

더 이상, 전생이나 과거 타령을 멈추어야 합니다. 어는 누구도 앙굴리말라보다 흉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앙굴리말라가 기쁘게 살수 있다면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앙굴리말라는 붓다의 구원을 받고 성자가 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과거의 업보로 지금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과거는 소멸됐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과거의 걸음보다 지금 네가 어디를 향하여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가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소멸되지 않은다면 지금 열심히 한다고 해도 지옥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가 소멸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길을 가는가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린 전생타령을 멈춰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우리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붓다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전생의 업으로 치부하는 일희일기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원인이 있어도 결과가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제 1차에서 4차까지 술을 마셔 필름이 끊어졌다고 다음날 필름이 끊어진채 출근을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멀쩡히 살아서 직장을 가는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모내기 하는 것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모를 심다가 점심때가 되자 모여앉아 밥을 먹는데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 붙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밥을 먹더니 하나 둘씩 뒤로 옆으로 쓰러지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비위생적으로 식사를 하더니 끝내 죽었나 보네.. 쯧쯧 안됐네'하고 혀를 찼는데 한 삼십분 지나자 하나 둘 일어나더니 논으로 들어가 다시 모내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런 문화를 보지 못했던 서양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겠지여.

 

그처럼 '전생과 과거'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생과 과거를 마구잡이로 휘둘러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게 맞다면 앙굴리말라는 붓다의 제자이자 성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앙굴리말라는 나의 멘토입니다. 내가 아무리 허물을 갖고 있어도 앙굴리말라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간이 작아서 앙굴리말라가 한 악행의 새발의 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멘토입니다. 앙굴리말라가 구원받고 성자가 됐다면, 우리는 1년 내내 공부도 안하고 잠만 자도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앙굴리말라가 행복하였다면 우리도 당연히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고 있는데 어떻게 과거의 허물만 고정돼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다만 어렸을때 개울에서 놀다가 개울 옆의 감자밭에서 감자를 쪄먹은 적은 있습니다. 젖은 모래로 감자를 싸서 불을 해놓으면 그 수분으로 감자가 기가막히게 익습니다. 이것은 훔친게 아닙니다. 그렇게 쪄먹는 것은 남의 집 감자라야 맛있는 법입니다. 어른들은 알면서도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죄업도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과거의 발자국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지금의 발걸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앙굴리말라가 붓다의 은혜를 받고 성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감자 캐먹은 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른들은 작작 먹어라, 즉 적당히 해라 하시는 것이 유일한 비난입니다. 감자 줄기를 뽑지 않고 굵은 감자만 골라 먹으면 어른들은 가만 놔 두는 법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개울가에 감자를 심어 놓은 아저씨가 잘못한 것입니다. 학교를 가다가 옥수수나 콩을 구워먹는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자기 아이들고 그처럼 남의 것을 먹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파출소에 신고하면 그사람은 그 동네에서 살기가 힘들어지지요. 밭에다 담을 쌓고 혼자 살아라 하고 마는 것이지요.  

 

과거, 전생의 죄업이라는 상투적인 말과 생각에 빠져있는한 붓다의 은혜를 입을수 없는 것입니다. 붓다는 그런 돌대가리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붓다의 집은 수석전시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은 '네 의식을 깨라'는 붓다의 말씀입니다. 앙굴리말라가 행복을 얻었다면 우리는 아무 할 것이 없습니다. 먹고 자고 옷입고...., 그렇게 편안한 일상을 보내는 것입니다. 끝으로 반야심경을 봉독하는 것으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뚜아에무아-히트송모음[20분,가사자막,7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