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 혜천스님설교

2018. 10. 27. 21:1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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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5년 5월 1일

붓다의 가르침

 

 

오늘 강론의 주제는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오월은 부처님 강탄일(降誕日)이 있는 달입니다. 그래서 오월 한달 동안 강론은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진행하겠습니다.

 

인간의 세계는 특별한 세계가 아닙니다. 한계성과 가능성을 행렬하는 메트릭스 세계입니다. 부처님은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가능성을 열어 보이시고, 우리에게 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세계는 한계성을 강조하죠.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을 받아들이라고 하죠. 힌두교도 모든 것은 전생의 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태생의 한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한계성을 깨뜨리고 우리에게 가능성을 열어 주십니다. 가능성을 지나 무한성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사성제, 팔정도, 오온, 십이처 등등... 수없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없는 가르침에 수없는 말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네의 수많은 발중의 하나의 발에 불과합니다. 지네는 발이 많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재들은 저 많은 발로도 어떻게 엉키지 않고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 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두발로 가는 것도 엉켜 넘어지곤 했는데 말입니다. 부처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지네의 수없는 발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지네의 발 하나가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네의 수 많은 발 중의 한 발에 불과합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발 하나에서 DNA를 추출하면, 그것이 지네를 대표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발이 지네의 DNA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지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네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입니다. 정이 안간다는 말입니다. 제가 삼척 영은사의 작은 암자에서 스승인 탄허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 일입니다. 뭔가 사각사각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리가 소름이 끼쳐서 일어나 촛불을 켰습니다. 그랬더니 한 15cm쯤 되는 지네가 머리맡에서 뭐가 그리 바쁘신지 부지런히 가고 있었습니다. 그 놈을 바라보고 있자니 참 정이 안 갑니다.우리가 지네의 발 하나를 떼어 DNA를 분석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지네를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희망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계성에 맞닥뜨려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그 가능성을 넘어 그 밖에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한계성에 맞딱뜨리면, 그 한계성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계성에 무릎 꿇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위대한 한계성이여! 나는 오직 복종하겠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부처님은 한계성에 복종하는 것은 노예의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한계성에 맞딱뜨렸을 때,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그 가능성에 나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말하는 정진(正進) 입니다. 부처님은 어느 날 잠들어 있는 아내 야수다라와 아들 라훌라를 마지막으로  보고 떠납니다. 크샤트리아의 칼을 놓고 집을 떠납니다. 나는 그것을 한계성을 넘는 행위라고 봅니다.  

 

우리는 태생의 한계, 전생의 한계를 말합니다. 태생은 이 생, 전생은 이 생 이전의 세상입니다. 여성들은 대개 전생의 공주들이죠. 전생을 가르쳐 준다는 전생 가이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생에서 아마 가장 좋은 직업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생을 가르켜 준다는 이유로 경비를 지출하고,  그 경비를  내가 받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시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전생의 좋은 태생을 가르켜 주는 것이 좋죠. 너는 전생의 공주, 너는 전생의 왕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내가 정승, 판서의 자식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남의 집 앞에서 '밥 한 숟갈 주십쇼'라는 처지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은 전생의 무엇이냐와는 상관없이 현재 태생인 거지입니다. 우리는 전생과 태생의 한계성을 인정하라라고 요구합니다. 신의 피조물이니, 신에 복종받기를 강요 받습니다. 

 

제가 항상 말하지만, 사람은 자기의 이력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걸 습(習)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크샤트리아의 칼을 내려 놓는 것은 태생의 한계와 자기가 지내온 이력의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여러 스승을 모시고 수행을 통해서 많은 명상과 고행을 합니다. 이를 통해 않은 체험을 얻지만, 어느 날 네란자라 강에 목욕합니다. 이것은 가능성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보리수좌 앉아 깨달음을 얻죠. 이것은 가능성 밖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너의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을 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항상 한계성에 부딪치죠. 그리고 그 한계성을 깨달으라고 가르치죠. 그 한계성을 인정하라고 말하죠. 그래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한계성을 인정하고 나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요한 것은 이 가능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계성만 말하는 데 머물렀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한계성은 우리가 매일 깨닫는 것 아닙니까? 3일을 굶으면, 인간의 한계성은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계성을 깨닫습니다. 몰라서 한계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왜 넘어가지 못하는가? 우리가 한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금을 긋고 이 곳을 넘지 말라.' 이것이 한계성입니다.  

 

강론의 모두에서 인간 세계는 가능성과 한계성이 함께하는 메트릭스 세계라고 했습니다. 메트릭스 이론이 뭡니까?  일정한 숫자가 가로, 세로로 행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하나의 숫자와 전체의 숫자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메트릭스 세계입니다. 인간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계성과 가능성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그것에 한계성을 인정하느냐 또는 가능성을 극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은 너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 세상의 주인이 너 자신이라고 했을까요? 한계성을 가능성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순간에 우리는 한계성에 부딪칩니다. 나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계성에 부딪친다고 해서, 한계성에 머물르고, 가능성을 열지 못하면 우리는 미래로 갈 수 없죠.

 

부처님은 미래를 선점하라고 얘기히죠. 왜 우리 삶이 덜 행복한지 아세요? 미래를 선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선점하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20년 전 저하고 친한 스님한 분과 탈출을 감행한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떠나 넓은 바다에 살아보고 싶었죠. 달랑 비행기표 두장을 사서 태국으로 떠났죠.  미안마에도 가 볼 생각이었죠. 그저 '좋으면 그 곳에서 살자' 하면서 떠났습니다. 출발은 장대했습니다. 꿈도 컸죠. 조금 전에 얘기 했죠.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고. 문제는 호텔에서 부터 걸립니다. 밤에 방콕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호텔로 가자고 하니, 아주 근사한 호텔에 내려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약없이 이 호텔에 왔기 때문에, 카운터에서부터 방 잡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왜? 말이 안통해서입니다. 게다가 외국 호텔을 예약없이 그 자리에서, 사람이 가서 방을 잡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말이 안통하는 두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책임을 진다더니 확실히 책임을 지긴 졌습니다. 입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코리안 잉글리시가 통할리 없었습니다. 그런 후 카운터 여직원이 어디론가 전화해서 바꿔 줍니다. 전화에서 반가운 한국말이 나옵니다. 거기 근무하는 직원의 아내가 한국 사람이어서 연결된 것입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아니 여기가 한국이야? 말도 안통하는데, 직접 방을 잡으려 한다니, 예약을 했어야지요.' 어쨌든 그 분 도움으로 방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뒤에 현지인들을 만났을 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저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옵니다. 영어 못하는 사람들은 니혼징이 많다는 것입니다. 

 

선점한다는 것은 예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선점했다면, 가서 짐만 풀면 됩니다. 선점이 안 되어 있으면,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칩니다. 선점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선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래를 선점하려면, 한계성을 넘어야 합니다. 미래를 선점하지 못하면, 행복한 삶의 여행을 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긴 역사에서 보면, 우리는 우주의 여행자입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머나먼 안드로메다를 걷는 여행자입니다. 우주의 여행자로서 행복한 여행을 하려면,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지지리 궁상을 떨다가 방콕에서, 진짜 방콕에서 방콕하다 국제미아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지 말고, 우리 가자.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나고요? 한 번 겪고 나니까 또 나갔죠. 한동안은 이 절 저절 다니면서 잘 놀았습니다. 그랬더니 뜨거워서 피부가 홀랑 벗겨지대요. 그래서 거기서 큰 깨달음을 얻고 인도행을 포기(?) 했습니다. 원효가 중국행을 결심했지만, 서해에서 해골물을 먹고나서는 깨달음을 얻어 중국행을 포기 하잖아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코리안 잉글리시는 안 통한다는 것. 그 지지리 궁상의 경험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제가 그 다음 미안마행을  안 했겠죠. 누구나가 삶의 여행이 항상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인간 세계는 한계성과 가능성을 행렬하는 메트릭스 세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과 불행이 행렬하는 세계입니다. 단, 한계성과 가능성 중에 어느 것에 올라 타느냐? 행, 불행 중에 무엇에 올라타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 달려 있습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가능성을 열라는 것입니다. 한계성에 머무르지 말고, 제발 그 한계 타령 하지 말고. 한계성에 머무르느냐 아니냐는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한계성에 머물러 있던 크샤트리아 전사였습니다. 크샤트리아의 한계성을 그가 29살에 넘죠. 우리는 고타마 싯타르타에 비하면 마이 늙었습니다. 왜 늙었다고 표현하냐고요? 봄꽃같은 서윤양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건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때는 붓다가 아닙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계성을 향해 가죠. 부처님께서 정진하라고 하죠. 우리는 정진하면, 다리 꼬고 앉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정진입니다. 일본에서는 사찰요리를 정진요리라고 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하는 요리라서 그런가? 다리를 꼬고 앉아야 명상을 할 수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진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계성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주장해왔듯이, 사고의 문제이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가보면, 깨달았다고 하는 분이 세상에는 깨알같이 많습니다.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람도 있고, 하늘의 도가 자신을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길에 다니면, 깨달았다는 사람이 하도 많아 발에 채입니다. 마치 가을 낙엽처럼 성인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한계속에 머무르고, 그 한계 속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중생이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부처라고 안하고.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이 김구선생이 짐승어원설을 피력했지만, 스님이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는 사고의 한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고의 한계 속에 갇혀 있잖아요? 이 세상에는 자신의 눈 높이 만큼만 보고, 자신의 쳥력 만큼만 소리를 듣습니다. 어떤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자기 세치 혀 감각기능 밖에 맛보지 못합니다. 그 맛밖에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정진이나 명상도 느끼고 보는 것인데, 스스로 한계를 지닙니다. 이것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 속에서 느끼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청룡열차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청룡열차가 떨어질까 무서워 못 탑니다. 옛날에는 무서워서, 지금은 남의 이목 때문에 못 탑니다. 청룡열차는 올랐다, 내렸다, 뒤틀리고 합니다. 그러나 궤도를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궤도를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됩니다. 청룡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지 마십시요. 기왕이면 상상도 아름다운 상상을 하십시오. 이왕에 상상을 할거면. 멋지고 근사한 것을 상상하십시오.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우중충한 상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산해 피피피를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룡열차가 궤도를 벗어나지 않듯이, 명상 속에서도 한계성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정진하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한계성을 넘어서 가능성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을 열어 가는 길이 정진입니다. 인간은 우주 여행자로 길을 갑니다. 가능성을 향해 가는 여행자는 정진수행자입니다. 부처님은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삶은 너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쯤 졌을라는 가요? 여주 돌산에 산진달래가 만발했다 졌겠군요. 정선 다래봉에 철쭉이 온 산을 안아주고 있겠죠. 그러나 그 철쭉을 완상하지 않는 한, 그 철쭉은 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보지 않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누가 전해준다 할지라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근사치에 갈 수는 있겠지만, 그 아름다움 전체를 느낄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르죠. 왜? 똑같은 사물을 보아도 각자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죠. 산에서 뱀을 만나면, '그 뱀 이쁘다'고 할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극소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독사를 보면, 나도 모르게 위축됩니다. 깜짝 놀라죠. 경상도 말로 식겁합니다. 사물을 보고도 각자가 동일한 느낌을 갖지 않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여행자가 여행을 하는 것은 스스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 위해서 입니다. 마치 은하철도 999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철이와 메텔처럼. 철이와 메텔은 우주 여행을 하면서 각 정거장마다 많은 일을 겪죠. 제가 본 만화영화 중에 그 구성이 탄탄하기로는 으뜸입니다. 사실 여주인공도 이쁘잖아요. 메텔과 철이만이 은하철도 999를 여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하철도 999에는 메시가 있습니다. 철이는 피가 흐르는 인간이죠. 철이는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서 가능성에 도전합니다. 메텔은 특수신분이죠. 우주의 지배자가 있는데, 메텔은 그녀의 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다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밝혀지죠. 메텔은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을 향해 가는 철이를 데리고 우주를 여행합니다. 우리는 철이, 부처님은 메텔입니다. 은하철도 999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는 것은 메텔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메텔은 알고 있죠, 무엇이 일어날지를. 메텔이 철이를 데리고 은하철도를 탄 것은 그녀 어머니의 지시 때문입니다. 왜 뚱딴지같이 은하철도999 얘기를 하느냐구요? 부처님은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을 획득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을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입니다.

 

수학에서도 마지막 공식은 무한입니다. 물리학에서도 마지막은 무한입니다. 무한은 참 재미있습니다. 무한 더히기 무한도 무한, 무한 빼기 무한도 무한, 무한 나누기 무한도 무한, 무한 곱하기 무한도 무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은 진리의 세계죠.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솔직히 '명상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명상도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부처님의 가르침일 수는 있지만, 전체는 아닙니다. 지네의 수많은 발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능성을 넘어 무한성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러했듯이,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능성을 열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도가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하늘이 미쳤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인간만을 통해 도를 이루게 하게. 왜 하늘입니까? 인간세계에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하늘입니다. 이것은 4,000년 전 중국 황제의 주장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이 도를 깨달았다고도 합니다. 하늘이 그 사람만 총애합니까? 하늘의 도가 그 사람 눈에만 띤답디까? 도가 되었건 아니건 특정인의 것이 아닙니다.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이나 무한성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가능성을 열려는 의지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가 '붓다,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처음 서두에서 인간세계는 한계성과 가능성이 행렬하는 메트릭스 세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가 전체를 작동시켜 변화를 일으키죠. 가능성과 한계성은 언제나 자리를 바꿉니다. 한계성과 가능성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리를 바꿔 변화를 일으킵니다. 부처님은 그걸 연기라고 하죠. 연기를 현대적 설명으로는 메트릭스 세계라고 하는 게 근사치 설명일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속에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진입니다. 정진은 한계성을 긍정하지 말고, 가능성을 열어 보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할려면, 현실의 한계성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 행복하고 싶으면, 현실의 한계성을 깨트리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덜 행복한 것은 왜일까요?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계성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난 안돼! 저 높은 나무를 어떻게 올라가? '

 

1980년대 살맛 안나는 이땅에 혜성같이 나타나, 살 맛 안나는 중생을 위한 구세주가 누군인지 아세요? 이주일선생입니다. 그런데 그 이주일이 남궁원의 얼굴로 나타났다면, 세상 사람들이 배꼽을 잡아 웃어 주었을까요?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니 웃음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계성입니다. 이주일 선생은 자기 못생긴 외모를, 최대한 그것도 비싸게 팔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단 한계성에 갇혀서 가능성을 열고 나가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여행자입니다. 철이와 메텔처럼 부처님이 우리를 데리고 한계성이라는 역에서 가능성이라는 역을 향해 갑니다. 거길 지나 무한성역이라고 하는 진리세계로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한계성에 머물지 말고, 가능성을 열라, 그리고 그 가능성을 지나서 무한성에 이르라.'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많은 지네의 발 중에 하나의 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것이다'라고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한성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찾아와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알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분은 이 대답에 놀랐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모릅니다. 왜냐구요? 나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러 보지 못햇기 때문입니다. 단 우리는 추론할 수는 있습니다. 왜? 부처님의 말씀이 있으니까. 내가 이르지 못한한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단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정합니다.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능성을 열어 가는 것, 그것이 불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능성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조금만 더,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우리는 가능성의 문안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정진할 뿐입니다. 그 가능성에 이르러, 가능성의 문 밖에 나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철이를 보호하는 메탈처럼, 가능성 역에서 무한성의 역으로 향해가는 우리와 동승하고 있습니다.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찾으려 하지 마십시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은하철도999의 차장이 검표하러 오듯이 부처님이 오십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자리에 앉아 우주여행을 즐기면 됩니다. 한계성역을 출발해서, 가능성역을 지나서, 무한성역을 향해가는 열차에서 우주를 관찰하십시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하나! 눈 감고 주무시지는 마세요. 그러면 우주를 볼 수 없을 테니까요.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밤에 듣는 잔잔한 인디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