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머무르지 말고 미래로 전진하라|…… 혜천스님설교

2018. 10. 20. 19: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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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에 머무르지 말고 미래로 전진하라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5년 4월 24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현재에 머무르지 말고 미래로 전진하라'입니다.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생성과 소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과 전생의 과보론이라는 가르침은 중요한 자기모순을 드러냅니다.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입니다. 고정 불변의 것은 없다.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생의 과보론이 그것입니다. 왜일까요? 전생의 과보론은 고정불변론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정불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풍토와 문화가 다르다면, 나의 가르침을 바꾸어도 좋다"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수동적 표현입니다. 적극적인 표현으로 하면, 나의 가르침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풍토와 문화가 다르다면'를 요새식으로 말하면, '시대와 상황이 변하면'입니다. 즉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얘기가 달라진다, 즉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가 병들어 죽으면, 길가에 버려집니다. 특히 숫소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황소가 암소보다 비쌉니다. 고기를 먹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황소가 가치가 없습니다. 암소는 젖을 짜먹기 때문에 황소는 대체적으로 버려집니다. 문화와 풍토가 다르니까 인도 사회의 황소는 사람으로 치면, 천민취급을 받아 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황소는 대접받습니다. 값이 암소보다 비쌉니다.

 

 

말라도 비싼 양

 

히말라야 산맥에서 양을 사고 파는 가격은 양이 살이 찌고 안찌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양을 골짜기에 갖다 두죠. 양이 바위 병창을 향해 올라가면, 비쩍 말라라도 비쌉니다. 양이 계곡을 향해 내려 가면, 살이 쪄도 값이 쌉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아래는 아름답지만, 해발 4,000이나 5,000 정도 되면 정말 먹고 살기 곤란합니다. 그 악조건인 바위투성이 벼랑을 향해 올라가는 양은 생존력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쌉니다. 계곡을 향해 내려가는 양은 생존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생존확률이 낮습니다. 고산의 바위 벼랑에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곳에 매어두면,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이 곳에서 양의 가격에 쌀이 쪘느냐의 여부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높은 산을 향해 올라가는 양이 비쌉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우수한 DNA를 가진 양입니다. 우리는 해발 2,000이 넘는 산조차 없고, 풀 없는 산도 없습니다. 설악산이 바위산이라지만, 바위 틈으로 풀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산양이 많이 서식하는 산이 설악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양은 살이 피둥피둥 쪄야 우수한 DNA를 가진 것으로 취급됩니다. 왜 다른가? 풍토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풍토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황소가 버려지고 우리나라에서는 어서 오십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현재에 머무르지 말고 미래로 전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과거를 끌고 와서 현재를 규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를 끌고 들어 옵니다. 우리나라 각지에 쉼터가 있습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를 위한 쉼터 말입니다. 이런 쉼터는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런 쉼터는 필요없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런 몰인정한 인간'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100점짜리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합니다. 개떡같은 말도 끝까지 들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합니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할까요? 매 맞는 아내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옛 속담에 '동냥을 주지 않을지언정, 쪽박을 깨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냥을 주지 않는 사회, 매 맞는 아내가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끌고 들어와서 현재를 해석합니다. 업설과 과보설이 그것입니다. 한국 불교 1600년 동안 업설과 과보설은 많은 해악을 끼쳐 왔습니다. 부처님은 현재조차 머무르지 말라고 했는데, 과거로 현재를 해석하면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과거를 끌어오는 것은 우리가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쉼터가 없는 사회, 매맞는 아내가 없는 사회, 그런 마음을 감히 먹지 않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에서는 65세부터 자기 삶의 황금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65세가 되면, 정년을 맞기 때문에, 그 때부터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65세 이전까지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기의 의무를 다합니다. 물론 세금도 팡팡 냅니다. 그리고 65세 이후부터 자기가 꿈꾼 세계를 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누군지 아세요?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은 100만부가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시집으로는 가장 많이 팔린 시집입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여주인공으로 이보희씨가 나왔습니다. 내가 그 영화를 봤습니다. 그렇다면 도종환이 가장 사랑받는 시인입니까? 이태백입니다. 이태백이라는 말이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니까요. 소설 주인공으로 가장 사랑받는 주인공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관음장, 장발장이라고요? 아닙니다. 서유기에 나오는 사오정입니다. 옛날에는 사기치는 친구들이 옆구리에 육법전서를 끼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은, 요새 젊은이들은 이태백 시집을 아예 가슴에 품고 다니죠. 사오십대는 서유기를 아예 머리띠에 접어서 다니죠. 우리는 40대에 사오정을 걱정합니다. 

 

내가 어젯밤에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왜 이태백과 사오정이 사랑받는지를. 두 가지 결론이 났습니다. 하나는 모두 전생의 죄업으로 , 그 과보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을 믿지 않는 징벌이죠. 저 많은 교회 첨탑이 밤이면 붉은 빛을 발산하는데, 왜 대한민국에서는 이태백과 사오정으로 고통받을까요? 이 말이 맞습니까? 안맞다고 생각하는 건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믿음이 깊으면, 이 말이 깊이 새겨져야 합니다. 부처님은 현재에 머물러서는 미래로 전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4,000년전 인도의 과거의 업설, 3,000년전 유대인의 신의 징벌에 관한 믿음을 끌고와서 현재를 규정지으려면 안됩니다. 그러면 미래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축(軸)의 시대 이전에는 어떤 발전이나 전진도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 문화, 인도 문화, 중국문화의 발전은 모두 축의 시대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발전할 것은 이미 이 시대에 다 발전되었고, 그 이후로는 어떤 발전이나 전진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 이후에는 그 때 발전한 여러 것들의 해석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해석이라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 재미있는 성명서가 하나 실렸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뭐 있겠습니까? 돈, 권력, 명예 이런 것들이 제게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저 남아도는 시간뿐이죠. 그래서 성명서를 읽어봤죠. 그게 무슨 성명서냐? 동학농민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는 거죠. 하기야 독립 유공자도 있고, 6. 25 참전 유공자도 있으니까  동학농민군을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는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내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그걸 지지해야 임진왜란 때의 그 분들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않겠어요. 돈 만 있으면, 살수대첩에 참가한 조상들도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광고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과거를 자꾸 현재에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과거를 자꾸 현재에 끌어들이면, 삶의 장애가 됩니다. 동학농민군을 유공자로 끌어들이면, 살수대첩 참가자들도 유공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아마 각 집안의 족보를 파헤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 유공자 아닌 집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동학농민군을 폄하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넓히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왕조 시대에는 역적으로 몰리면 조상의 묘도 파서 없앴습니다. 지금 영화를 누린다고 해서, 왕조시대 같으면 백골조차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지나서 미래로 전진하는 것이지,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은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 말라고 합니다. 불퇴전의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부처님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부처님은 소욕지족(所欲知足)을 말합니다. 그것은 현재에 머무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를 향해 전진합니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동물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지 않습니다. 그저 등 따숩고 배부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미래로 전진합니다. 따지고 보면, 과학의 발전도 그래서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미래를 위해 전진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이유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강론에서 앙굴리 마라 얘기를 했습니다. 할머니들이 재미없어 하니까 얘기를 하는둥 마는둥 했습니다만 앙굴리 마라는 불교에 나오는 최고의 악인입니다. 그 이름이 유래하듯 사람을 죽이고 그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했을 정도로 악인입니다. 그런 앙굴리 마라 같은 악인도 나중에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고정불변이라면 앙굴리 마라 같은 악인은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보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싯구에나 있는 얘기지,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땅만 쳐다보고 살지 않는 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같이 남의 집 감자, 옥수수, 콩을 주인 허락도 없이 가져와 구어 먹은 적이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 기준으로는 도둑질이 아닙니다. 옛날 어른들은 ‘이 놈들 작작 좀 해라’고 할 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옥수수를 따되 부러뜨리지 말고, 감자나 고무마를 캐되 뿌리 째 뽑지 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옛날 전두환 대통령 집권시절에는 영화제목들도 참 거시기 했습니다. 벌레 먹은 장미, 아스팔트 위의 여자. 뻐꾸기 몸으로 울었다 등등. 그 중 가장 멋있는 제목이 ‘훔친 사과가 맛있다’입니다. 내 밭 감자보다 남의 집 밭 감자가 맛있습니다. 왜일까요? ‘밥맛이 없을 때는 울타리 밑에만 가서 먹기만 해도 맛있다’는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밥맛이 없을 때, 들에 나가서 먹어보면 입맛이 돕니다. 그러니 울타리만 벗어나도 밥이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옛날 분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건 그 시대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집에 방문한 손님에게 주인이  '식사하고 가세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식사하는 사람은 진짜 눈치없는 사람입니다. 일본인들에게 그 말은 이제 밥먹을 때가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부엌에서 들거덕 거리는 상 차리는 소리가 나는데도 손님이 돌아가려 한다면 주인은 모욕을 느낍니다. 일본인들은 이웃에 폐를 끼치면 안됩니다. 폐를 끼치면 더 이상 이웃으로 살아가기 힘듭니다. 우리는 폐를 끼치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남부여대해서 산으로 도망쳐 화전이나 일구며 살면 됩니다. 춘천은 계주가 곗돈을 떼먹고 도망가면 됩니다. 이런 계주를 종결자 계주라고 한다나요. 그러나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시대에 각 집안은 봉건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현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일본에는 단가제도라는 것이 있어 그 주민들은 반드시 사찰에 소속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찰주지가 발행하는 통행증이 없으면, 후평동에서 석사동으로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과 척을 진다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옆 집에 폐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수틀리면 야반도주 하고, 화전이나 일구고 숨어사면 됩니다. 일본인이 남에게 극도로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해서는 안된다고 많은 스님들이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부처님은 정사正邪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8정도를 말한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왜그런 가르침을 말할까요?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판단기준을 끌어다 현재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주자는 불교를 혹세무민이라고 비판합니다. 불교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 700년 전 남송 주희의 주장입니다. 이 비판에 대해 불교는 아직도 시정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판단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걸 시정하지 않고 현재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자주 끌고 오면, 현재를 살기 힘듭니다. 그가 설사 유영철의 아들이라고 해도 유영철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과거이고, 자식은 현재이며, 또 내 자식은 미래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이지 과거를 향해 돌아가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맴돕니다. 영화이든 굶주림이든 그것은 과거입니다.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속박의 사슬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속박, 번뇌는 과거의 기억입니다. 인간은 기억의 동물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전진할 수 없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멸시키지 못하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소멸시키면, 새로운 업이 생기지 않습니다. 과거를 소멸시키면, 우리는 미래로 전진할 수 있죠. 우리가 과거를 소멸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로 전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말고, 불퇴전의 노력을 하십시오. 우리는 오직 미래로 전진할 뿐입니다. 이것이 곧 삶이자, 기도이자, 수행입니다. 부처님 또한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현재에 머물지 말며, 하물며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됩니다. 과거를 들먹이는 사회는 퇴행의 사회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한국 불교의 1600년 동안 공功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퇴행시키는 과過도 있습니다.

 

과거를 끌어다 현재를 규정하는 인간은 날 수 없습니다. 항공모함의 함상에 있는 비행기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파도에는 상관없지만, 큰 파도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비행기가 내릴 때도 낙하산을 펴 속도와 거리를 줄입니다. 세계 최고의 경주용 자동차를 운전하는 슈마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했지만 요새는 시원찮두만. 슈마허가 자동차 뒤에 낙하산을 매달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셔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꼴등입니다.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일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데, 과거로 돌아가니 마음과 몸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뱀을 잡기 위해 산허리에 그물을 쳐 놓으면, 뱀이 월동을 하기 위해 산을 오르다 그물을 만나게 되죠. 그러면 뱀은 그 자리에 멈춥니다. 우리가 딱 그 뱀의 신세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내가 뜻하지 않는데 돌발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항상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살지, 상상의 세계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도 꿈을 꾸고, 악몽과 가위에 시달려 보기도 했습니다. 성장기에는 꿈에서 날개가 없는 데도 마구 날아다닙니다. 나이들면 꿈을 꾸어도, 꿈에서 날아다니지 않습니다. 그 만큼 청소년기에는 왕성한 무한정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먹어 세상에 부딪쳐 그 꿈이 쪼그라들어 꿈속에서조차 사오정이 될까 떱니다. 우리는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에 삽니다. 일생에 걸쳐 장애나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장애와 어려움을 만나면,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을까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치 뱀이 그물을 만나 멈추듯 합니다.

 

우리는 솔직해야 합니다. 내가 어려움과 장애를 겪는 것은 연구가 부족해서 입니다.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연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석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문화는 철저히 분석하는 문화입니다. 왜냐구요? 사무라이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적을 분석하지 않으면 내 목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남쪽에서 왜군이 쳐들어오면, 선조처럼 중국으로 도망칩니다. 이승만처럼 적이 물러나면 그 때야 서울로 돌아와, 안죽고 부역한 자들을 처벌하면 되니까요. 대한민국을 잘 아는 사람도 우리가 아니라 일본입니다. 우리는 일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독도문제에 정통한 사랑은 한국 사람이 아닙니다. 일본에서 귀화한 호사카 유지(保坂祐二)라는 세종대 교수입니다. 정작 우리는 그런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 사람은 대범합니다. 통크게 놀아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장애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분석과 해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중가수 이한철의 슈퍼스타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괜찮아 다 잘될꺼야. 물론 잘 되죠.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승컵은 하나인데, 모든 사람이 우승컵을 들수야 없는 것이지요.

 

장애와 어려움이 있으면, 그걸 극복해야 합니다. 그물에 걸리면, 그걸 잘라야 합니다. '못 올라가는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를 베어라'라고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합니다. 무지악스런 나무는 베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쳐다보지도 못합니까? 그렇다고 제 말을 곡해하지는 마세요. 감나무는 베어내지 마십시요. 가을에 감을 따먹어야 하니까. 모든 걸 과거를 끌어들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리는 현재를 살고 있으면서 미래로 전진합니다. 부처님이 업 얘기를 하는 것은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잘 살라는 얘기입니다. 전생의 업 때문에 니 인생이 그 모양, 그 꼴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미래에 전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니가 담대한 도전을 하라는 것입니다. 후회를 만들지 말고. 그리고 철저히 분석, 이해하라.   오늘 강론의 주제가 '현재에 머무르지 말고 미래로 전진하라'입니다. 부처님은 만족하지 말고, 불퇴전의 노력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직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임종님(와일드캣츠) 스타 앨범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