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사대는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2018. 11. 3. 12: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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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사대는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고 나면,

만법이 오직 '하나의 법계'일 뿐 임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하나의 법계'란 바로 <둘 없는 한 마음>이니,

따라서 '제 성품'이 항상 온갖 곳에 두루함을 환히 알게 된다.

오직 순일(純一)하고 청정한 '한 마음'이 올올이 다함 없는 빛을 놓을 뿐이요,

거기엔 본래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일도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일도 없으며,

일체의 '이치'나 '도리'가 붙을 여지가 없다.


만약 터럭 끝만한 '이치'라도 있다고 보아서 거기에 의지하여 머무른다면,

이것은 '허망한 경계'에 그 '마음'을 끌어내리는 것이 되므로,

다시금 무명의 짙은 안개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조심하고 삼가야 할 일은 바로 헛된 '지견',

 ― 그것이 '불법'에 관한 지견이건, '마귀 법'에 관한 지견이건 막론하고 ―

온갖 '지견'에 가려서, 항상 저절로 환히 밝기만 한 이 '신령한 광채'(神光)를

어둡히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무릇 '보는 일' '듣는 일'은 모두가 오직 '마음'으로부터 나는 것이며,

'마음' 밖에는 진실로 털끝만한 한 법도 따로 체성이 있는 것이 없어서,

저마다 서로 알지 못하고, 서로 이르지도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법'이기 때문에 서로 보고, 서로 알고,

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를 만한 법이 본래 없는 것이다.

'제 성품'이 이미 온 누리에 두루하여서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데,

다시 어디로 가고 오고 할 일이 있겠는가?

다만 본래 스스로는 '작용이 없는 참 성품'(無作 眞性)이

― 마치 음성 따라 메아리를 이루듯이, ― '머무름이 없는 인연'(無住因緣)을 지어서

허망하게 나투는 곡두(幻) 같은 형상들을 '실다운 존재'(實有)로 보기 때문에

중생들이 헛되이 '나고 죽는 것'을 보게 되고, '가고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중생은 '성품'이 없어서 본래 생사가 없는데,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 라커니, '본래 생사가 아니라'커니 하면서 멋대로 헤아리는 것이며,

모든 '부처'도 본래 '성품'이 없어서, 사실은 '보리'와 '열반'이 없는데도,

다만 중생들은 망령되이 「모든 '부처'에겐 '보리'와 '열반'이 있다」고

말하는 것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참 마음' 가운데는 본래 '부처'도 '중생'도 없고, '번뇌'도

'보리'도 없는데, 다만 중생의 분별심 때문에 이런 것들이 실재하는 듯이 보일 뿐인 것이다.
 
만약 한 중생이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면 이것을 일러서

<비로소 발심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발심(發心)이라는 말도 이제는 상식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즉 '발심'이란 원래 <'마음'을 밝혔다(發明) >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렇게 밝혀진 '마음'을 '부처'라고 하며, '도를 보았다'(見道)고 하기도 하며,

이에 의하여 중생을 깨우칠 수 있으면 이 사람을 일러서 <'무명'을 통달한 사람>

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약하건대, '무명'은 본래 없고, 모든 '중생'도 '부처'도 다 없어서,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사람을 '깨달은 이'(覺者)라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다만 본래 스스로 청정한 '한 마음'의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성품이 없는> 이 '미묘한 지혜'(妙慧)가 메아리를 따라 감응하면서

널리 색신을 나타낼 뿐이니, ― 이와 같은 도리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할 수 있으면

이것을 '큰 자비'(大悲)라고 하는 것이다.


동산(洞山)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

  『 죽은 중이 천화(遷化)하여 어디로 갑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 불타고 난 뒤의 한 줄기 새순이니라. 』 했다고 한다.

나중에 고목성(枯木成)에게 어떤 중이 이 화두를 들어서 묻기에, 선사가 대답하기를,
  『 어떤 중이 고덕(古德)에게 묻기를, 「죽은 중이 천화하여 어디로 갑니까?」 하니,

고덕이 대답하기를, 「달은 지더라도 하늘을 여의지는 않느니라」 고 했다고 한다.

자고로 이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었는데, 예컨대, ···

「배가 다니는 것은 모두 키(舵)를 잡은 사람에게 달렸느니라」 하기도 하고,

「맛 좋은 술은 외딴 시골에는 없느니라」 하기도 하고,

 또한 「불탄 뒤의 한 줄기 새순이니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인데, ···
여러분이여, 이 네 가지 화두 중에서 하나는 하늘을 받들고 땅을 버티는 것이요,

 하나는 범의 굴, 마귀의 궁전이요, 하나는 털을 쓰고 뿔을 인 것 이요,

하나는 근본을 곧장 드러낸 것이다.


여러분, 가려낼 수 있겠는가?

만약 가려낸다면, <나고 죽음>(生死)이 한 경지요,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이 한 근원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연을 대치하면서 마땅히 '자기행'(自己行)을 닦을 지니라. 』 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어느 고덕이 남긴 '공부 십절목'(工夫十節目)이라는 제목의 글에 부쳐서,

열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참된 공부'(眞修)의 요체(要諦)>가 될 만한

심요(心要)를 추려 보았다. 이 짤막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꼭 한마디 덧붙일 말은,

모름지기 '말'이나 '글'에 비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다

'마음의 자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간곡히 당부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이 글을 읽고 나서 혹시 깨달은 바가 있더라도 그 모두를

'마음'에 붙여두지 말고 성큼 회심하여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림으로써

그 마음으로 하여금 항상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청정한 본래의 성품>을

어둡히지 않도록 항상 삼가면서 <닦음 없는 닦음>의 진수를 증득하기 바란다.


- 대우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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