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 4|…… 혜천스님설교

2018. 11. 3. 12: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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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5년 5월 29일

붓다의 가르침 4

 

 

5월은 중요한 달입니다. 부처님께서 오신 달이기도 하거니와 저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달입니다. 2000년 5월 2일, 미안마행을 했습니다. 그 곳을 가기 전에 나는 그저 다른 다른 개가 짖으면 따라 짖는 한 마리의 개였습니다. 갔다온 후로는 남을 따라 짖지 않았습니다. 미안마행이 스스로 짖고 싶을 때 짖는 한 마리의 개가 된 계기였습니다. 저한테 5월달은 중요한 달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있기도 하지만, 특히 저한테는 잊을 수 없는 5월달입니다. 

 

제가 저번 강연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이 사람의 눈동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도 사람의 눈동자라고 했습니다. 눈동자가 가장 작은 이유는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동자가 가장 큰 이유는 눈동자가 모든 것을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눈동자는 우주조차 담아냅니다. 제가 말하는 눈동자는 육신의 눈동자인 동시에 마음의 눈동자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와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이익입니다. 즉 이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생각이나 의견이  달라서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은 이익으로 종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생각이나 이념이 달라서 충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생각이나 이념이 다르면, 이익 역시 달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충돌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사표를 던진 공직자가 잇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념과 생각이 달라서가 아니라 이익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나아가는데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익을 공유하고자 하면 나아가는데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익이 있으면 나아가는데 망설임이 있고, 이익이 없으면, 나아가는데 두려움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아파마나(aparim a 또는 appa-m na )를 얘기합니다. 아파나마는  인도 빨리어로, 중국에서는 무량심(無量心)으로 번역합니다. 우리는 한량없는 마음으로, 또는 가 없는 마음으로 번역합니다. 나는 '잴 수 없는 마음'으로 번역하고 싶어요. 부처님은 끊임없이 이파마나할 것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4가지(사무량심: 자무량심(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심(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를 얘기하죠. 자애심으로 아파마나 하기, 아픔으로 아파마나 하기, 기쁨으로 아파마나 하기, 차별없이 아파마나 하기가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애심, 아픔, 기쁨, 차별 없음을 이파나마라고 하죠. 부처님은 네 가지를 얘기하지만, 그 요지는 하나입니다. 자애심으로 아파나마 하기입니다. 누구에게? 대상에게. 끊임없이 대상을 향해 자애심을 아파마나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대상을 향해 아파나마 하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딱 둘, 즉 너와 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너를 향해 아파나마 하기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이익이 있어도 나아가지 않고, 설사 불이익이 있어도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기 입니다. 설사 그로 인해 내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칭찬을 들어도, 욕을 들어도 두려워 하지 않고 나아가는게 아파나마 입니다.

 

지난 주 강론에서 우리의 생각만으로는 컵이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컵은 손으로 들어 올릴 때만, 움직여 지죠. 부처님은 일생을, 45년간이나 아파마나 하죠. 부처님이 그 세월 동안하는아파마나 하는데도 이익이 별로 없습니다. 45년간이니까 16, 425 그릇의 밥을 얻어 드신 것이 전부입니다. 45년간 아파나마 한 댓가, 이익으로 치면 보잘 것 없지 않습니까? 하루 밥 한끼가 고작입니다. 오히려 부처님은 당한 불이익이 더 많았어요. 부처님은 이런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사회를 혼란시키고, 질서를 파괴하는 자로 말입니다. 우린 이런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생애 동안 어떤 어려움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부처님은 살해 위협도 받고, 위해를 당할 뻔 하기도 했으며,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으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눈동자가 작아서 자기 눈동자에 들어오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가 붓다라고 할지라도. 부처님은 그 시대 눈동자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경전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아파마나를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을 자애심으로 끌어안아 사람들이 행복을 얻지 못할까봐, 이익을 얻지 못할까봐 걱정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가르침을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행동은 필요치 않습니다. 말씀만이 필요합니다. 사실 나는 부처님의 그러한 행동들이 부담스럽습니다. 왜 부담이냐구요? 인간은 내 자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을 위해 산다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종교인들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종교인들 조차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명예가 높아지길 원합니다. 그들은 근본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남에게 밥을 던져 줄지언정, 밥을 던져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밥을 던져 줄 사람이 있는 세상이 좋죠.

 

인간은 누구나 돈, 명예, 권력, 사랑을 추구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저는 돈 없이도 사니 돈은 별 상관없고, 제 몰골을 보고 쫒아올 여자가 없을 것이니 사랑도 그렇고, 권력을 주겠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뻔뻔해서 그런지 세상의 눈과 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명예욕이 그것입니다. 뭔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뻔뻔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얘기 하는 것입니다. 실터럭 만큼의 명예욕도 없다면, 나는 이 자리에 앉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아직 무언가를 하고 싶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제자로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너 자신을 위해, 행복을 위해 아파마나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조차 버리신 분입니다. 스스로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45년간 인도 대륙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존경하는 사람보다는 질시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제가 일전에 어떤 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존중받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내 삶이 존중받지 못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날 존중해주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파나마는 나와 대상,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존중받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동시에 존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너에게 존중받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존중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집에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존중받지는 못합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한 것입니다. 가을 추수 끝난 초겨울의 텅빈 들판에 나홀로 서서 찬바람을 맞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죠. 왜 그럴까요? 내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윤리나 도덕을 초월해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말을 멍멍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나 도덕은 우리 삶,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동안 인간세계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인륜이자 도덕입니다. 우리는 천상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투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 분은 천상세계에서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왔구나!'라고 생각하십시요. 그런 분들은 낯 설죠. 왜? 준비가 없어서 입니다. 천상 세계 1년이 인간 세계 100년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 천상의 시간으로 따지면, 인간 세계의 삶은 잠시 소풍 나온 것이죠. 내일 소풍이라면 어떻습니까? 잠을 설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씨가 흐립니다. 천둥, 번개, 비바람을 맞으며 소풍을 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풍길이라서, 자기 몸 하나 의탁할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상세계에서 인간세계로 처음 온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죠. 인간세계의 방식, 그게 바로 윤리이며, 도덕입니다. 인간에게 맞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각자의 인간에게 맞는 가르침인 대기설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천상세계의 가르침을 준다면, 그것이 비록 궁극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나쁜 가르침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자에게는 굶주림을 해결해주는 것, 목마른 자에게는 해갈을 시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전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농부가 찾아 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그 농부에게 밥을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묻습니다. 저 농부는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왔는데, 왜 밥부터 먼저 주라고  하느냐고 말이죠.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죠. 저 농부는 먼 길을 오느라 며칠을 굶었다. 가르침보다는 밥이 먼저다. 그러니 밥을 주라. 그리고 한 잠 자게 하라. 그리고 깨어나면 데리고 오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꿈 속에 존재하는 세계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꿈 속의 얘기만 하죠.   

 

내가 누차 멀씀드렸지만, 명상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명상은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을 위해 명상을 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그럴려면, 적어도 명상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명상을 하지 않으면, 적어도 남을 망치지는 않습니다. 시골 농부는 남을 망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명상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자애심으로 채우라고 말합니다. 수행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자애심으로 채우는 것은 마치 군인이 전장에 나가기 위해 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적을 이기려면, 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빈 라덴을 잡으려 파키스탄에 간다면, 비행기에 내리기도 전에 잡힐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일입니다. 빈 라덴을 잡으려면, 그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애심을 키우는 것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가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불이익을 감내하고 나아가는데 굼뜨고, 두려워 합니다. 우리는 앉습니다. 서서 경행을 합니다. 심지어 누워 있는 것, 밥을 먹는 것조차 모두 자애심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 아닌 것이 없어요. 특별히 명상이라고 하는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내 몸과 마음에 자애심을 채워, 주변을 촉촉이 적시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본 적이 있는가?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니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남을 따라 짖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애심을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 한끼의 밥을 얻죠. 경전에 보면, 어느 날에는 밥을 먹지 못한 때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 16,425끼에서 더 빼야죠.

 

하루에 밥 한 그릇 제대로 못 얻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아파마나하신 부처님을 보면, 내가 어느 때는,  특히 요 며칠 사이 출가한 후회를 많이 해요. 내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부처님 행을 배우지 않아도 되고, 부처님 행을 배우려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될 것인데 하는 후회말입니다. 내가 후회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처럼 할 수 없어서 입니다. 저는 제 이익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강해 부처님처럼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지킬려는 의지가 너무 강합니다. 내게는 명예욕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하루 최소한 세끼의 밥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무 손해를 많이 보는 것 같아 밤에 잠이 오질 않습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이 후회되기도 합니다.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입니다.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이지, 부처님이 아닙니다. 부처님인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과 같을 수 있다고 했을까요? 부처님은 그런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했을지도 모르죠. 사실 나는 그런 세상이 올까 두렵습니다. 그런 세상이 오면,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가 폐지를 주어 갔다 주었는데,  그 값으로 다시 돈다발 폐지를 받죠. 왜? 돈이 폐지처럼 여겨지는 세상일테니까요. 그러니 폐지 모은 댓가로 받는 그 돈이 도로 폐지 아니겠어요? 그러면, 폐지 줍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얼마나 허망하겠어요. 내가 가져 간 걸 값을 쳐서, 그걸 도로 주다니! 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마음 속에 자애심으로 충만시키면 됩니다. 그 외의 것은 다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마음 속에 자애심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요. 눈을 감고 내 마음을 평화롭게 놓아버리면, 자연스럽게 자애심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죠. 물을 얻으려면 웅덩이를 파면 됩니다. 웅덩이가 있으면, 물이 고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들숨, 날숨을 하면서 마음을 평화롭게 놓아버리면,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게 됩니다. 자애심이 생기죠. 그 자애심이 차면 넘칩니다. 넘치면 흐릅니다. 마음은 흐르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한 것처럼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 폭포를 만나면 폭포수로, 강을 만나면 강물로 흐릅니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조바심을 내지 마세요. 우리 삶의 최대 적은 조바심입니다. 조바심은 빨리 뭔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돈오돈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옛날 세일러문인가 하는 만화에서 세라공주인가가 마술봉을 돌리면 세상이 바뀌죠. 돈오돈수란 마치 그처럼 세상이 바뀌는 것인데, 이런 것은 애니메이션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천천히 움직입니다. 봄이 오면, 우리 몸이 나름하고, 피곤하며, 웬갓 기분이 우울해지죠. 그건 계절의 변화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도와 습도 등의 계절이 변화에 우리의 몸이 적응하는데 한 달이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우리의 몸이 한 순간 변하지 않습니다. 즉 한 달 후에야 우리 몸이 변화에 적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돈오돈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옛날 몰랐을 때 얘깁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지금 과학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정보를 과신합니다. 자식에 대해 얼마나 모성애가 강한가? 이 질문에 대해 현대 과학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호르몬이 바뀌면 애를 바깥에 던져 버리죠. 제 아무리 쪽집게 도사도 머리의 특정 세포를 자르면, 아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쪽집게 도사가 다 아는 소리 하는 것도 뇌의 작용입니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우울해 하는 것도 특정 부분의 뇌를 드러내면 그렇게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한 순간에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미안마에 있을 때, 자칭 고수란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 단계 올라가 있다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스님이 말하는게 이게 아니요? 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니 주제에 그걸 어떻게? 라는 반응이 되돌아오더군요. 고수라는 것은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누가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 수가 빤하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떡을 50그램 씩 나눠 줘 보면, 얼레 저 사람을 더 이뻐 하나봐? 저 떡이 더 커 보이네. 눈 앞에서 재어서 줘도 저울로 장난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마음이 조급해서 입니다. 마술처럼 세상이 뿅하고 한꺼번에 변화하는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부처님조차 한 순간에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돈오돈수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기입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파마나 하면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별 다른게 아닙니다. 별 다르다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왜? 부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살 뿐입니다. 어떤 분이 미래를 알고 싶어, 저한테 미래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미래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내가 한 발자욱 움직이면, 그것이 미래입니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이 미래입니다. 

 

길을 가면, 신발에 돌에 차여 신발이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조급해 하지 마십시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문합니다. Slow, Slow. 천천히. 네 마음 속에 자애심을 일으켜 채우라.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꿈 속에서 죽었다고, 아침에 눈 뜨는데 지장이 있습니까?

 

오늘은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말하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로 마무리 합니다. "Slow, Slow. 천천히, 천천히. 네 마음 속에 자애심을 채우라. 한 순간에 네 마음이 변화하지 않는다." 천천히 채우다 보면, 어느 순간 임계점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내 삶이 변화합니다. 그렇게 빨리 뛴다는 우샤인 볼트도 100미터에서만 빠릅니다. 우리는 100미터만 뛰고 그만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앞으로 90년은 뛰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Slow, Slow. 부처님의 말씀은 서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삶은 한계성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메트릭스 세계이다. 한계성을 건너고 가능성을 넘어 무한성에 이르라.' 서두르면 갈 수가 없습니다. 왜? 지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계성을 지닙니다. 그것을 넘어 가능성에 이르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버티는 자만이 이깁니다. 버티면 가능성이 열립니다. 가능성이 열리면 무한성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한 어느 누구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계성과 가능성이 행렬하는 메트릭스 세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시그널 OST PART 4] 김윤아 (Kim Yuna) -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