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0. 14:0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새벽을 열어가는 행복 / 틱낙한
내가 숨을 들이쉬는 것이 삶이고,
내가 숨을 내쉬는 것이 삶이다.
내가 내딛는 한걸음 한 걸음이 삶이다.
내가 호흡하는 공기가 삶이다.
나는 푸른 하늘과 풀꽃, 나무들과 접촉할 수 잇다.
새들과 또 다른 인간존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의 수많은 경이로움들과 접촉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더 충족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사로잡히고,
지금 이순간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김태완의 '서장(書狀)'통한 선공부]
여사인(呂舍人)에 관한 답서(1)
사량분별(思量分別)은 계속 허상(虛相)만 만들어 낼뿐…
"모든 부처와 조사는 단 한 법(法)도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다만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믿고(信), 스스로 알아 긍정하며(解), 스스로 보고 실천하며(行),
스스로 깨닫기(證)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을 취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그르칠 것입니다.
이 일은 결정코 언설상(言說相)을 떠나 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떠나 있으며
문자상(文字相)을 떠나 있습니다.
모든 상(相)을 떠남을 알 수 있는 자도 다만 여사인(呂舍人) 뿐이며,
죽은 뒤에 단멸(斷滅)인지 단멸이 아닌지를 의심하는 자도 다만 여사인(呂舍人) 뿐이며,
곧바로 법을 가리켜 보이기를 바라는 자도 다만 여사인(呂舍人) 뿐이며,
매일 매 순간 성내거나 기뻐하거나 사량(思量)하거나 분별(分別)하거나 멍청함에 빠지거나
들떠 안절부절 못하는 것도 모두 여사인(呂舍人)일 뿐입니다.
오직 이 여사인(呂舍人)만이 온갖 기이하고 특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모든 부처 모든 조사와 모든 중생과 더불어 적멸(寂滅)의 대해탈광명(大解脫光明)의
바다 속에서 함께 헤엄치며 놀고 세간과 출세간의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 선(禪)공부는 사람들 저마다 자기의 타고난 본성(本性)을 확인(確認)하고
본성(本性 ; 근본성품)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본성(本性)은 얻은 적도 없고
잃은 적도 없으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본성(本性)은 모양이 없고 크기도 없고, 시작도 마침도 없고, 상하팔방이라는
방위가 없고, 모든 곳 모든 때에 다 있고, 온 우주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본성(本性)을 어떻게 확인(確認)하는가?
눈을 통해 모양(形)과 색(色)을 볼 때 모양과 색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本性)만 남고,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코를 통해 냄새를
맡을 때 냄새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혀를 통해 맛을 볼 때 맛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피부를 통해 사물과 접촉할 때 촉감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의식을 통해 무엇을 생각할 때 생각나는 무엇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는다. 즉 지금 이 순간 온갖 행위동작을 하는 여기 이 자리, 사량분별하는
여기 이 자리, 느끼는 여기 이 자리, 의도하는 여기 이자리에서 상(相, 모양, 이미지,
개념)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이러한 모든 행위동작과 사량분별과 느낌과 의욕이
모조리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본성이니 선이니 공부니 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해석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행위가 모두 본성(本性)이고 달리 또 다른
본성(本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읽고 이리 저리 생각하고 머리
굴리고 궁리하는 것이 바로 본성(本性)이고 따로 다른 본성(本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 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본성(本性)이며,
손 끝에 느껴지는 신문지의 촉감이 본성(本性)이고 이 본성(本性)과 별개로
또 다른 본성(本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본성(本性)은 매 순간 매 순간의
모든 일에서 조금도 숨김 없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도(道)를 도라고 말하면 도이면서도 도가 아니고, 선(禪)을 선이라고 말하면
선이면서도 선이 아니고, 본성(本性)을 본성이라고 말하면 본성이면서도 본성이 아니다.
그 까닭은 진실로 모든 것이 도(道) 아님이 없고 선(禪) 아님이 없고 본성(本性)
아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해서 허망하고
헛되고 허황된 상(相)을 만들어서 어이없게도 그 허황된 상 허상(虛相), 망상(妄想)에
애착하고 가로막혀서 그만 진실, 도, 선, 본성, 진리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량분별(思量分別)도 진실, 도, 선, 본성, 진리이고 사량분별
(思量分別)로 만들어내는 망상 허상조차도 모두 본성(本性)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본성(本性)을 벗어나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본성(本性)을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망상 허상을
따라다니며 분별 망상 번뇌로 가득찬 삶을 살아가는가?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또 하나의 다른
분별 망상 번뇌 허상을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해야할 일은 오직 하나, 분별 망상 번뇌
허상을 깨버리고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대로의 본성(本性)을 진실하게
확인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번뇌 망상 허상은 사량분별(思量分別)함에서 생기므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통해서는 계속 번뇌 망상 허상을 만들어 낼 뿐 그것을 깨버릴 수가 없다.
분별 망상 번뇌 허상을 깨버리기 위해서는 완전히 쉬어버리는 문을 반드시 한 번
통과해야 한다. 이제까지 의지하고 있던 번뇌 망상 허상과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잡을 것 없는 허공(虛空)을 붙잡는 듯한 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 도(道), 법(法), 선(禪),
본성(本性), 깨달음, 참나, 여사인(呂舍人)에 대한 간절하고 진지한 믿음(信)을
가져야 한다.
여사인(呂舍人)에 관한 답서(2) 범부는 사량분별(思量分別) 속에 머물며 집착
"[마른 똥막대기]는 어떻습니까? 붙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뱃속이 갑갑함을
느낄 때가 바로 좋은 소식입니다. ...다만 세간의 잡다하고 피곤한 일들을 사량(思量)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른 똥막대기] 위에 돌려 놓고, 사량하고 또 사량하여서 어떻게도
사량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기량이 문득 다하면, 곧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영원히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다른 일은 결코 사량하지 말고
다만 [마른 똥막대기]를 사량하되, 언제 깨달을 것인가는 묻지 마십시오.
지극히 빌고 빕니다.
깨달을 때에는 시절도 없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으며, 즉시 고요해져서 저절로
부처도 의심하지 않고 조사(祖師)도 의심하지 않고 삶도 의심하지 않고 죽음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곳에 이르는 것이 바로 부처(佛)의 지위(地位)입니다.
부처의 지위에서는 본래 의심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고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고 열반도 없고 반야(지혜)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이렇게 말하는 자도 없고, 이 말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도 없고 받아들이지 않음을 아는 자도 없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렇게 말하는
자도 없습니다."
범부중생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늘 불안에 떨면서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찾고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집착하는 것이
범부중생라고 할 수 있다. 왜 불안한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불확실하고 의문스러운가? 깨달음의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범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깨달아서 지혜의 바른 눈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공부의 가장 요긴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지혜의 바른 눈을 갖추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지혜의 눈을 갖추기 전이라면 불확실하고 의문스러움에 의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집착하기 마련이다. 지혜의 눈을 갖추기 이전에
범부가 가진 눈이란, 보고·듣고·냄새 맡고·맛 보고·느끼고 의식으로 생각을 하는
이른바 6근(根)의 눈이다.
그러므로 범부중생은 보이는 것에 의지하고 집착하며, 들리는 것에 의지하고 집착하며,
냄새에 의지하고 집착하며, 맛에 의지하고 집착하며, 느낌에 의지하고 집착하며,
생각에 의지하고 집착한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뿌리 깊은 집착은 생각에 의지하고
집착하는 것, 즉 사량분별(思量分別)에 의지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중생은 사량분별(思量分別) 속에서 온갖 사량분별(思量分別)인 선(善)과
악(惡)을 찾으며, 중생과 부처를 찾으며, 옳음과 그름을 찾으며, 마음과 대상을 찾으며,
지혜와 어리석음을 찾으며, 삶과 죽음을 찾으며, 윤회와 해탈을 찾으며,
돈오(頓悟)를 찾고 점수(漸修)를 찾으며, 주관과 객관을 찾으며, 이렇게 말하고 듣는
자를 찾으며, 선(禪)을 찾고 도(道)를 찾으며, 공?罐? 찾고 깨달음을 찾는다.
범부는 이와 같이 사량분별(思量分別) 속에서 모든 분별을 찾아서 분별에 머무르고 집착한다.
그러나 사량분별(思量分別) 속에서 온갖 사량분별(思量分別)인 무엇에 머무르고 의지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불안을 해소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뿐이고, 그 머무름과 의지가
또 하나의 불안의 원인이 되어 사실은 불안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의지할 무언가를 찾는 그 마음을
포기함으로서,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는 막막한 상황에 직면하고, 이 막막한 상황에서
본래 아무것도 붙잡지 않고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참된 존재,
참나, 본성, 도(도), 진리, 본성, 깨달음이라는 것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처럼 잡을 것 없는 곳에서 살아 있는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 것이며, 지혜의 바른 눈을 갖추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완전히 놓아버림
속에서 되살아나는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오래 선을 공부하고 마음공부를 하고
좌선을 수행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부 다 의식(意識) 속에 의지하여 꾸며내는
망상(妄想) 환상(幻想) 허깨비일 뿐이다.
김태완 - 부산대 강사 . 철학박사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인디음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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