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5. 10:5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원각경
[원각경 강설]007
7. “선남자야, 위없는 법의 왕에게 큰 다라니문이 있으니 이름을 원각(圓覺)이라 한다.
일체의 청정한 진여와 보리, 열반과 바라밀을 흘려보내 보살을 가르친다.
모든 여래는 본래 일으킨 인지에서 모두 청정한 깨달음의 모습을 원만히 비춤에
의지하여 영원히 무명(無明)을 끊고 비로소 불도(佛道)를 이루었다.”
善男子。無上法王有大陀羅尼門。名?圓覺。流出一切?淨?如菩提涅槃及波羅密。
?授菩薩。一切如來。本起因地。皆依圓照?淨覺相。永斷無明。方成佛道。
【강설】
“선남자야!”
이 일구(一句)를 바로 보아야 한다.
가장자리 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이 오니 無邊虛空一句來
거북 털과 토끼 뿔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 龜毛兎角滿乾坤
“선남자야!”가 일어났다 사라진 그 자리가 “무(無)”, “마삼근(麻三斤)”,
“마른 똥 막대기”, “뜰 앞의 잣나무”의 낙처(落處)이다.
바로 지금 당장 그대의 눈앞이다.
위없는 법의 왕은 누구인가?
위대하고 위대한 법의 왕이여! 摩訶大法王
짧지도 않고 또한 길지도 않네. 無短亦無長
본래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건만 本來非?白
곳에 따라 푸르고 누렇게 나타나네 隨處現靑黃
이 모양도 빛깔도 없으면서 모든 모양과 빛깔을 드러내는 이 법의 왕이
바로 큰 다리니문(陀羅尼門), 곧 총지(摠持),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
가르침의 문이다. 이 텅 빈 자리에서 일체의 현상의 생멸 변화가
경험되지만, 이 텅 빈 자리는 본래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오직 이 한 물건만 홀로 드러나 있으니 獨有一物常獨露
흔들림 없이 고요하여 생사를 따르지 않네 湛然不隨於生死
이 물건이 이름하여 원각(圓覺), 원만한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이다.
사람마다 본래 완전하게 갖추고 있어 다시 밖에서 찾아 구할 것이 없는 것이
이 진리이다. 진리가 바로 지금 여기의 ‘나’와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결코 바로 지금 당장 여기의 ‘나’, 본래의 ‘나’를 벗어나 있지 않다.
이것이 불이(不二), 둘이 아닌 소식이다.
당당한 대도(大道)여, 堂堂大道
눈부시게 빛나고 분명하구나! 赫赫分明
사람마다 본래 갖추어져 있고 人人本具
낱낱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도다 箇箇圓成
이 원각이 바로 진여(眞如), 보리(菩提), 열반(涅槃), 바라밀(波羅密)이다.
부처는 부처가 되기 이전 자리인 인지(因地)에서부터 청정한 깨달음의 모습을
원만히 비추는 것에 의지하여 영원히 무명(無明)을 끊고 불도(佛道)를 이루었다.
불도를 이루었다 하지만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원각, 원만하고 완전한 깨달음에
의지하여 어리석음에서 벗어났을 뿐 새롭게 무엇을 얻은 것은 아니다.
불도는 인과(因果)에 의해 이루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이루어 만들 수 있거나 구하고 얻을 수 있다면 불도가 아니다.
다만 범부(凡夫)의 망상이 사라질 뿐 但盡凡情
달리 성인(聖人)의 견해랄 것이 없다 別無聖解
[원각경 강설]008
8.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옛날부터
가지가지로 뒤집어진 것이 마치 길을 헤매는 사람이 사방을 바꾸어 아는 것처럼
사대(四大)를 잘못 알아 자기 몸의 모습으로 삼고
육진(六塵)에 인연된 그림자를 자기 마음의 모습으로 삼았다.
비유하자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의 보거나 두 번째 달을 보는 것과 같다.”
云何無明。善男子。一切?生。從無始來。種種?倒。猶如迷人四方易處。妄認四大?自身相。六塵緣影?自心相。譬彼病目見空中花及第二月。
【강설】
무명(無明)이 무엇인가?
바로 지금 당장 ‘무명’이라는 말소리에도 따라가지 말고,
‘무명’이라는 말뜻에도 따라가지 마라.
바로 그러할 때 무엇이 진정 ‘무명’의 본체인가?
보지 못했는가?
무명의 실제 성품이 곧 불성(佛性)이요, 無明實性卽佛性
허깨비 같이 빈 몸이 바로 법신(法身)이다. 幻化空身卽法身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허망한 분별에 속는 것이
중생의 뒤집어진 생각, 전도(顚倒)요,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꿈인 줄 모르는 착각, 몽상(夢想)이다.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를 자기 몸이라 여기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에 수용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진(六塵)으로 말미암은
온갖 느낌, 감정, 생각들을 자기 마음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이다.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에도 몸과 마음이 있던가?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꽉 들어 있을 때에는 몸도 마음도 나타나지 않지만,
그 나타나지 않은 줄 아는 것은 있지 않은가?
꿈도 꾸지 않은 줄 알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줄 아는 물건 하나는
오롯이 있지 않은가? 제 스스로는 분별되어 알려지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아는 그 물건이 있어서 이 몸과 마음, 육근과 육진,
온갖 세계가 드러나지 않는가?
제 스스로 훤히 밝은 물건 하나가 역력하지 않은가?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有一物於此
본래부터 從本以來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昭昭靈靈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고 不曾生不曾滅
이름을 지을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名不得狀不得
이것을 말이나 개념, 생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움직이는 헛것을 보거나 달이 두 개로 보여
실제로는 없는 두 번째 달을 보는 것과 같다.
한 티끌이라도 눈에 있으면 一?在眼
허공 꽃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空華亂墜
[원각경 강설]009
9. “선남자야,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는데 병든 사람이 허망하게 집착한다.
허망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 허공의 자성에만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저 꽃이 실제로 생기는 곳에도 미혹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삶과 죽음에 돌고 도는 일이 허망하게 있게 되니 그러므로 무명이라 한다.”
善男子。空實無花。病者妄執。由妄執故。非唯惑此虛空自性。亦復迷彼實花生處。
由此妄有輪轉生死。故名無明。
【강설】
바로 지금 당장 눈앞에서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 한 알을 그려보라.
아마 어렵지 않게 눈앞에 복숭아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 상상으로 그린 복숭아는 눈병 난 사람이 보는 허공 꽃과 같이 보이지만
사실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그런데 그 허상이 그려지는 눈앞의 허공은 진정 무엇인가?
이것을 ‘허공’이라 불러도 이미 틀렸다.
복숭아가 그려지는 이 자리, 허공 꽃이 보이는 그 자리에 어떤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상상 속의 복숭아, 허공 꽃일 뿐이다.
임제의 스승이었던 황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공이라는 견해를 내지만 않으면 허공이 곧 법신(法身)이다.
법신이라는 견해를 내지만 않으면 법신이 곧 허공이다.
허공과 법신이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부처와 중생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고,
생사와 열반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으며, 번뇌와 보리도 서로 모양이 다르지 않다.
일체의 모습을 떠나면 곧바로 부처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 인생의 전체 경험 또한 바로 지금 이 눈앞의 허공 아닌
허공 가운데 나타난 가공의 복숭아나 허공 꽃과 같은 것이다.
분명히 경험되지만 실제로는 먼지 티끌 하나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사무쳐 깨닫지 못하면 허망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공의 복숭아나
허공 꽃에 집착하듯 나고 죽음에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모양 있는 것은 凡所有相
모두 허망한 것이니 皆是虛妄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 보면 若見諸相非相
곧장 여래를 보리라 卽見如來
모든 현상들은 一切有爲法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고 如夢幻泡影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나니 如露亦如電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應作如是觀
그러나 모든 헛된 것들이 의지해 있는 그것은 진정 무엇인가?
눈앞에 상상으로 그린 복숭아는 어디에 의지해 있는가?
허공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는 그 자리는 진정 무엇인가?
그 자리를 말과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한 번 직접 밟아야만 한다.
원만한 깨달음의 도량이 어디인가? 圓覺道場何處
바로 지금 나고 죽는 바로 여기일세 現今生死卽是
[원각경 강설]010
10. “선남자야, 이 무명이라는 것도 실제로 바탕이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꿈속의 사람이 꿈꿀 때는 없지 않으나 꿈에서 깨어나면
얻을 수 없는 것을 깨우치는 것과 같다.
또 여러 허공 꽃들이 허공에서 사라지지만
반드시 사라지는 곳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생겨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태어남이 없는 가운데 허망하게 생겨나고 사라짐을 본다.
이런 까닭에 삶과 죽음에 돌고 돈다고 말하는 것이다.”
善男子。此無明者。非實有體。如夢中人。夢時非無。及至於醒。了無所得。如?空花。
滅於虛空。不可說言。有定滅處。何以故。無生處故。一切?生。於無生中。妄見生滅。是故說名輪轉生死。
【강설】
눈앞에 상상으로 그려낸 복숭아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분명 보이지만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있는 듯하지만 없고, 없는 듯하지만 있다.
상상 속의 복숭아는 생겨났지만 실제로는 생겨난 것이 아니다.
본래 그런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 속의 복숭아는 사라지지만 실제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물건이 본래 없었기 때문이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먼지 일어나지 않고 竹影掃階塵不動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 아무런 흔적 남지 않네. 月穿潭底水無痕
바로 지금 당장 눈앞에 드러나 있는 모든 현상들 또한 다르지 않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알아지지만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 ‘나’ 바깥에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나’ 역시 그러하다.
있는 듯하지만 없고, 없는 듯하지만 있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본래 생겨난 적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런 물건 자체가 본래 없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은 오직 마음일 뿐이고 三界唯心
모든 현상은 오직 의식일 뿐이다. 萬法唯識
나고 죽는 일은 상상 속의 복숭아가 나타났다 사리지는 일과 같다.
한 생각 망념으로 상상 속의 복숭아를 그렸으나 본래 복숭아는 없었다.
망념이 사라지면 복숭아 또한 사라지지만 역시 그런 복숭아는 본래 없었다.
생멸이 뚜렷한 가운데 본래 생멸은 없다.
본래 생멸이 없는 가운데 생멸이 다하는 일 또한 없다.
나고 죽음이 이것에서 나왔으나 生死於是
이것에는 나고 죽음이 없다. 是無生死
[원각경 강설]011
11. “선남자야, 여래가 인지에서 원각을 닦는 것도 이러한 허공 꽃임을 알면
삶과 죽음에 돌고 도는 일도 없고, 또한 저 삶과 죽음을 받을 몸과 마음도 없을 것이니,
조작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善男子。如來因地。修圓覺者。知是空花。?無輪轉。亦無身心受彼生死。非作故無。本性無故。
【강설】
바로 지금 당장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무엇’인지 모를 것이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무엇’이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음’ 그 자체다.
우리의 본래 면목,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음, 그 ‘무엇’은 어떤 분별보다 앞서 이미 있다.
우주의 시작보다도 먼저 이것이 있다. 우주가 사라지더라도 이것은 남아 있다.
이것 이외는 모두 허상이다. 그대가 잘못 그대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대의 몸과 마음도
허상이다. 그 몸과 마음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은 현상 세계도 허상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이 허상이다. 여래도 허상이다. 여래의 깨달음도 허상이다.
삶과 죽음도 허상이다. 삶과 죽음을 돌고 도는 일 또한 허상이다.
나아가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는 일 역시 허상이다.
모두가 허상이다. 조작해서, 애쓰고 노력해서, 수행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렇다. 본성이 그렇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사라진 것 같지만, 진실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사라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그대로일 뿐이다. 본래 그러할 뿐이다.
그것이 원각(圓覺)이고, 우리의 본래 면목, 본성이다.
보신과 화신은 참이 아니고 허망한 인연이니 報化非眞了妄緣
법신만이 청정하여 끝없이 넓도다. 法身淸淨廣無邊
천 강에 물이 있으니 천 개의 달이 뜨고 千江有水千江月
만 리에 구름 없으니 만 리가 하늘이다. 萬里無雲萬里天
[원각경 강설]013
13. “왜냐하면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은) 허공성이기 때문이며,
항상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如來藏) 가운데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기 때문이며,
지견(知見)이 없기 때문이며, 법계(法界)의 성품처럼 끝내 원만하여
시방에 두루 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바로 인지법행이라 한다.
보살이 이것으로 인하여 대승 가운데 청정한 마음을 내고,
말세의 중생이 이것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잘못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何以故。虛空性故。常不動故。如來藏中。無起滅故。無知見故。如法界性。究竟圓滿。
遍十方故。是則名?因地法行。菩薩因此於大乘中。發?淨心。末世?生。依此修行。不墮邪見。
【강설】
눈앞에 상상으로 그린 복숭아의 성품이 바로 허공성이다.
있지만 있는 게 아니고, 없지만 없는 게 아닌 것이 허공이다.
그 복숭아가 그려지는 그 바탕, 마음자리 역시 허공과 같은 성품이다.
어떠한 실체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단멸(斷滅)한 것은 아니어서
분명히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허공성이다. 텅 트여 가장자리가 없는 허공 같은 마음,
청정한 자각이 바로 우리의 본질, 본성이다. 이것은 본래 흔들림이 없다.
흔들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번뇌 가운데 있어도 그 번뇌에 물들지 않고
본래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 여래가 갈무리되어 있는 곳, 여래장(如來藏)이다.
분별망상으로 바쁜 이대로가 業識忙忙
부처님의 들고 남이 없는 큰 삼매이다. 那伽大定
이것이 모든 것을 보고 알지만, 이것에는 볼 것도 없고 알 것도 없다.
털끝만한 지견도 없는 그 자리가 여래의 청정한 원각자리, 중생의 본래 마음자리,
바로 (바닥을 탕! 치며) 지금 이 자리이다. 보고 싶고 알고 싶지만,
도무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 자리, 그러면서도 잘 보고 잘 아는 이 자리이다.
부처님이 말없이 꽃을 들어 보인 소식!
가섭존자가 그것을 보고 싱긋 미소한 소식!
내가 바로 나이지만 나를 알 수는 없는 소식!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바로 이 소식!
이것이 시방에 두루 하여 아무 모자람 없는 법계(法界)의 성품이다.
만약 사람들이 若人欲了知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三世一切佛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살펴볼지니 應觀法界性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든 것이다. 一切唯心造
오직 마음뿐인 이 도리, 누구나 본래 아무 모자람 없이 갖추고 있는
이 원각자리가 부처가 부처되기 이전부터 행한 법이요,
보살이 대승 가운데 일으키는 청정한 마음이고,
일체 중생이 의지하여 수행하는 바이다.
비록 사람 몸을 받았으나 雖受人身
마음은 여래와 한가지구나. 心同如來
그렇다면 어떤 것이 청정한 원각의 마음인가?
(침묵)
가고 옴은 사이가 없고 往復無際
움직이고 고요함도 근원은 하나이다. 動靜一源
천겁이 흘러도 옛날이 아니요, 歷千劫而不古
만세가 지나도 늘 지금이다. 亘萬歲而長今
임시로 사대를 빌려 몸을 삼고 假借四大以爲身
마음은 본래 남이 없는데 경계로 인해 있네 心本無生因境有
앞의 경계가 없으면 마음 또한 없으니 前境若無心亦無
죄와 복은 허깨비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네 罪福如幻起亦滅
꿈을 꾸면 꿈속에서도 현실과 똑같이 주관과 객관, 그리고 주관과 객관 사이의
지각과 인식 작용이 펼쳐진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안다.
그러나 결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며,
코로 냄새 맡거나 혀로 맛보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마음 작용이 그저 허망한 꿈의 일부일 뿐이다.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색깔, 소리, 냄새, 맛, 느낌, 현상도 없으며 無色聲香味觸法
눈의 영역은 물론 나아가 의식의 영역도 없다 無眼界乃至無意識界
꿈속의 눈은 꿈일 뿐이요, 그 눈이 보는 대상 또한 꿈일 뿐이며,
그 눈이 대상을 보는 의식 작용마저 꿈일 뿐이다.
귀, 코, 혀, 몸, 뜻도 또한 이와 같다.
따라서 아무리 보아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본 것이 없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안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꿈에서 깨어난 지금의 이 현실은 꿈과 다른 것인가?
마음 작용은 한바탕 꿈이요, 心行一場夢
마음을 쉰 것이 곧 깨달음이네. 息心卽是覺
꿈과 깨어남이 한결같은 가운데 夢覺一如中
마음 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네 心光照大千
- 몽지 심성일님의 <원각경강설 26>에서
돌려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諸可還者
자연히 그대가 아니네 自然非汝
그대가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 不汝還者
그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랴 非汝而誰
몸은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의 일시적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결국 다시 사대로 흩어진다. 느낌은 느끼는 자와 느끼는 대상의 접촉에서 비롯된 것이니
접촉의 인연이 사라지면 그것을 따라 사라진다.
마음은 현상을 인연으로 일어나고, 현상은 마음을 떠나 있지 않아서,
마음이 없으면 현상도 없고, 현상이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진다.
이와 같이 몸[身], 느낌[受], 마음[心], 현상[法]은 본래 무상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이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것이 아니다.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것은 믿고 의지할 만한 근거, 참된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인연으로 일어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그 바탕이 텅 비어 있다[緣起卽空].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런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바로 그것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는다.
몸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현상도 아니다.
마치 연극이 펼쳐지는 극장에, 무대도 사라지고, 배우도 사라지고, 관객도 사라지고,
마침내 극장마저 사라져도 남아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본래 있었기에, 다시 극장, 무대, 배우, 관객이 나타나 한 바탕 연극이 시작된다.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이 주먹이 사라지고, 이 주먹이 나타나는 배경도 사라지고,
이 주먹을 보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아있는가?
악!(大喝一聲)
머리 위에 머리를 얹지 말고, 물속에서 물을 찾지 말라.
바깥 대상을 아무리 보아도 그저 내 눈동자 속일 뿐이요,
바깥으로 아무리 멀리 걸어가도 언제나 자기 발밑을 의지해 있을 뿐이다.
(손뼉을 짝! 부딪치다)
- 몽지릴라 밴드 <원각경강설 40>에서
돌려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諸可還者
자연히 그대가 아니네 自然非汝
그대가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 不汝還者
그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랴 非汝而誰
몸은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의 일시적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결국 다시 사대로 흩어진다. 느낌은 느끼는 자와 느끼는 대상의 접촉에서 비롯된 것이니
접촉의 인연이 사라지면 그것을 따라 사라진다.
마음은 현상을 인연으로 일어나고, 현상은 마음을 떠나 있지 않아서,
마음이 없으면 현상도 없고, 현상이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진다.
이와 같이 몸[身], 느낌[受], 마음[心], 현상[法]은 본래 무상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이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것이 아니다.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것은 믿고 의지할 만한 근거, 참된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인연으로 일어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그 바탕이 텅 비어 있다[緣起卽空].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런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바로 그것은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는다.
몸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현상도 아니다.
마치 연극이 펼쳐지는 극장에, 무대도 사라지고, 배우도 사라지고, 관객도 사라지고,
마침내 극장마저 사라져도 남아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본래 있었기에, 다시 극장, 무대, 배우, 관객이 나타나 한 바탕 연극이 시작된다.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이 주먹이 사라지고, 이 주먹이 나타나는 배경도 사라지고,
이 주먹을 보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아있는가?
악!(大喝一聲)
머리 위에 머리를 얹지 말고, 물속에서 물을 찾지 말라.
바깥 대상을 아무리 보아도 그저 내 눈동자 속일 뿐이요,
바깥으로 아무리 멀리 걸어가도 언제나 자기 발밑을 의지해 있을 뿐이다.
(손뼉을 짝! 부딪치다)
- 몽지릴라 밴드 <원각경강설 40>에서
MBC 대학가요제 대상 36곡 [1회~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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