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有, 있음)과 무(無 , 없음) / 무비스님

2018. 12. 29. 21: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신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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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有, 있음)과 무(無 , 없음) / 무비스님




있음(有)도 쫓아가지 말고 없음(無, 空)에도 머물지 말라. 

莫逐有緣(막축유연)  勿住空忍(물주공인 ) 


-『신심명』- 


불교의 안목으로 볼 때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인가.

현실에만 집착하는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모든 현실을

무상(無常)한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보기 딱한 허무주의자의 삶도 이상적이 아니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모든 가치와 삶의 무게를 싣고 사는 현실주의자도 바람직한 인간상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는 철저하게 중도적(中道的)인 삶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왕자였을 때 석가모니는 아버지 정반왕의 왕궁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계절마다 각기 다른 휴양지와 미색의 여인과

음주와 가무 등등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다누렸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친 석가모니는 출가를 하였다. 


출가한 뒤에는 당시 인도의 출가수행자들이 흔히 하던 모진 고행을 자처하였다.

석가모니가 스스로 고행한 모습, 고행상(苦行像)을 보면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다. 고행을 하던 석가모니는 문득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고행을 멈추었다. 그는 목욕을 하고 우유죽을 먹고 바른 선정에 들어간 다음 7일 만에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최고의 바른 깨달음, 정각(正覺)을 이루고 붓다 세존이 토한 첫 사자후가 바로

중도선언(中道宣言)이었다. 향락에 빠진 추한 현실주의적 삶도, 고행에 빠진 딱한

허무주의적 삶도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나병(문둥병) 환자로서 일생을 천대 받으며 살아갔던 삼조 승찬(僧瓚, ?~606) 대사,

그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나서 그의 깨달은 바를『신심명』에 옮겼으며

그 저서를 통해 중도적(中道的)인 삶을 살라고 현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마치 석가모니세존의 중도(中道) 선언과 같은 입장이다. 한 사람은 스스로 향락과

고행이라는 양변의 삶을 경험하여 중도(中道)의 삶을 터득한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모진 병고를 앓으면서 중도(中道)의 삶을 터득한 것이다. 


모든 있음(萬有)은 가짜로 거짓으로 있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있음(有)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있음의한 가지인 건강한 육신에 즐거워할 것도 없고 도한 병고에 시달리는

육신이라 해서 괴로워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서 잠시잠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있음(有)은 인연(因緣)이며 인연(因緣)은 있음(有)이라는 의미에서

유연(有緣)이라 했다. 


모든 없음(無)은 그냥 막연히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음(有) 속에 숨어 있는 없음(無)이기

때문에 없음(無)을 공인(空忍)으로 표현했다. 마치 고통이 있는 사람이 그 고통을 참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참을 인(忍)자를 써서 공(空)을 나타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것(법, 존재, 현상, 대상, 경계)은 있으면서(有)도 없기(無)

때문에 없음(無)도 아니고 있음(有)도 아니다.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있음 없음을 다 수용하여 있음과 없음에 걸리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석가세존도 승찬대사도 있음 없음 양변을 동시에 부정하고 동시에 수용하면서

살 것을 우리들에게 권하고 있다. 그것이 “있음도 쫓아가지 말고 없음(無 , 空)에도

머물지 말라”라고 한 중도(中道)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有)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있음(有)에 집착하는 것이다.

또한 공(空,없음)을 따르는 것은 오히려 공(空, 없음)의 이치를 등지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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