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항상 웃지만 시끄럽지 아니하고 花恒有笑不喧擾

2019. 2. 16. 09: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원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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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항상 웃지만 시끄럽지 아니하고            花恒有笑不喧擾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볼 수 없네.                  鳥而啼唳不見見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먼지 일어나지 않고 竹影掃階塵不動
달이 연못 바닥을 뚫어도 물은 흔적 없네.      月穿潭底水無痕

어떤 것도 실다운 것은 없고 모두가 허깨비나 그림자와 같다.

온갖 변화가 일어나는 이 자리, 바로 지금 여기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모양 없는 가운데 모양이 드러나고, 소리 없는 가운데 소리가 나타난다.

느낌 없는 곳에서 여러 느낌이 출몰하고,

아무 생각 없는 곳에서 천차만별의 생각이 생멸한다.

아무리 나타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꺼져도 아무런 자취가 남지 않는다.

언제나 이와 같고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음이 이와 같을 뿐이다.

눈으로는 천차만별을 마주하나  目對千差
마음은 한 경계에 한가롭네.      心閒一境

 

- 몽지님의 <원각경 강설91> 중에서



 비유컨대 어둠 가운데 보배가 있지만    譬如暗中寶
등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無燈不可見
불법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佛法無人說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깨달을 수 없네.  雖慧莫能了

흔히 방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손가락 자체보다

손가락을 인연으로 달을 보는 것에 목적이 있다.

방편 또한 마찬가지여서 방편 자체보다 방편을 통해

자신의 본래 청정한 마음, 자성을 깨닫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달을 보려면 눈길이 손가락을 벗어나야 하고,

깨달으려면 과감히 모든 방편을 떠나야 한다.

우리의 본래 마음, 일체 여래의 맑고 깨끗한 원만한 깨달음은

닦아 익힐 것도 그것을 닦아 익힐 사람도 없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 당장의 이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그대의 눈앞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주하고 있으며 결코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든 것과

늘 함께 하면서도 제 스스로는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자리가 그것이다.

아직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허깨비와 같은

방편의 힘을 빌려 닦아 익힐 수밖에 없지만, 이 일은 결코

닦아 익혀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비록 닦아 익힌다 하지만 정작 닦아 익혀놓고 보면

닦아 익힌 것도, 그것을 닦아 익힌 사람도

허깨비 놀음 가운데 일이었음을 사무쳐 깨달아야 한다.

본래 그러한 것, 그것만이 진실, 곧 진리이다.

부처란 중생 마음 속의 부처이니                   佛是衆生心裏佛
자기 근기를 따라 감당할 뿐 다른 물건 아니네  隨自根堪無異物
일체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欲知一切諸佛源
자기의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라.         悟自無明本是佛


- 몽지님의 원각경 강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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