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26~30

2019. 12. 14. 13: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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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26


4-2 주인과 손님이 분명하다

 

 


是日에 兩堂首座相見하고 同時下喝하니 僧問師호대 還有賓主也無아 師云, 賓主歷然이로다 師云, 大衆아 要會臨濟賓主句인댄 問取堂中二首座하라하고 便下座하다


이날은 양당의 두 수좌가 서로 보고 동시에 “할”을 하였다. 
어느 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다.
“그 할에 손님과 주인이 있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손님과 주인이 분명히 있다.” 
임제스님이 말하시기를, 
“대중들아. 임제의 손님과 주인의 도리[賓主句]를 알고 싶으면 승당의 두 수좌에게 물어 보아라.”하시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강의 ; 졸탁동시(啐啄同時)의 소식이다. 또한 큰 불구덩이 속에서 솜털을 가지고 노는 일이 생겼다. 이날의 법회는 본래 전당(前堂)과 후당(後堂) 두 선방의 두 수좌가 서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 동시에 “할”을 한데서부터 발단이 되었다. 언제나 주객이 나누어 질 수 없는 혈혈단신, 독보건곤, 유아독존, 한 사람의 무위진인을 표방하는 임제의 깃발이 푸른 하늘에 펄럭이고 있다. 그 깃발아래 대중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기회는 왔다고 생각한 어떤 스님이 두 수좌의 동시 할을 들고 나와 시비를 걸었다. “두 사람의 할에 주객이 따로 있습니까?” 일이 벌어진 상황은 분명히 있어야 하고, 임제의 입장에서는 없어야 하는 처지다. 아니 본분종사의 견해로는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고 대답하면 그 역시 틀리는 말이다. 그런대 임제스님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빗나가고 말았다. “주객이 분명히 있다.”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틈을 주지 않고 “임제의 주객이 분명히 있다. 고 한 소식을 알려면 할을 한 당사자인 두 수좌에게 물어 보라.”라고 하였다. 주객이 있다, 없다는 말 대신 주객의 근본을 멀리 날려 보내버렸다. 마치 낚싯대를 늦추어서 잡힌 고기를 살려 주는 듯 하다가 다시 확실하게 잡아당겨 명줄을 끊어 놓는 격이다. 
일체 세상사는 모두가 주객이 나누어 진 데서부터 나누어지고, 다시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우주만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경계에 끌려 다니게 되면 고향에 돌아올 기약이 없다.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볼 날이 없다. 임제스님은 그런 사실들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이처럼 상큼하게 해결하였다.

임제록 27


5-1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上堂에 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竪起拂子하니라 僧便喝하니 師便打하다 又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亦竪起拂子한대 僧便喝이어늘 師亦喝하니 僧擬議어늘 師便打하니라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벌레를 쫒는 불자(拂子)를 세워들었다. 그러자 그 스님이 곧 “할”을 하니, 임제스님이 바로 후려쳤다. 
또 다른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또 불자(拂子)를 세워들자, 그 스님도 곧 “할”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또 “할”을 하니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곧 후려쳤다.


강의 ; 이 대목에 대해서 함부로 주각을 달거나 설명을 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어차피 모르고 하는 말이니 아무렇게나 말하고 싶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임제록은 불법의 대의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몸살이 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불법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불교의 대의는 실로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話頭)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천형(天刑)이다. 진정한 불교가 무엇일까? 도(道)가, 진리가, 무엇일까? 인생의 실상은 무엇일까? 하는 이러한 문제의식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길이다.


한데 여기에 너무나 쉽고 간단한 답이 있다. 사람의 사는 모습 그대로가 불교다. 진리다. 도다. 그 사람 그대로가 불교인데 다시 물으니 무어라고 일러줄 수밖에 없다. 가장 쉽고 간단명료하게 열어 보여주고 깨닫게 해 주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 행복하게 하였다[日日是好日].


임제스님은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자비스러운 분이다. 그런대 왜 불교를 어렵게 설명하겠는가. 가장 알아듣기 쉽고 바르게 가르쳐 주는 분이다.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고 그 가르침이 가장 뛰어난 분이다. 그래서 불교역사상 가장 큰 선지식이다. 임제스님 이후에는 모든 조사들과 노화상들과 선지식들이 다 임제스님의 법을 이었노라고 자랑하고 있다. 임제스님의 후손이 아니면 명함을 내지 못한다. 사찰마다 즐비한 비문(碑文)들이 그를 증명한다.

 
그 간단명료하고 쉽고 바른 가르침이 여기에 있다. “불교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늘 앉은 자리 가까이에 두어 먼지도 털고 벌레도 쓸어내는 도구인 불자를 들어 보인 것이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이 임제에게서는 불자를 들어 보였다. 나는 안경이 늘 가까이 있으니 안경을 들어 보였을 게다.

 
보여주면 알려는가. 들려주면 알려는가. 때려주면 알려는가. 그래서 불자를 보여도 주고, “할”을 하여 들려도 주고,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몽둥이로 때려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노파심으로 모든 정성을 다 쏟아서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가서 노닐게 해 주었다.


말이 난 김에 불자(拂子)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야기를 해 두고 싶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광엄성(廣嚴城)의 미후지(獼猴池)라는 못 옆에 있는 고각당(高閣堂)에 계셨다. 여러 비구들이 모기와 온갖 벌레들의 침입을 받았다. 상처 난 곳에 붙어서 쏘고 빨아 먹으므로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 말씀드렸더니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에게 모기나 벌레를 떨어내는 도구를 소유해도 된다는 허락을 하셨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비구들이 떨이게[拂子]를 갖게 되었다. 뒷날 법을 쓰는 도구로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임제록 28


5-2 다시 한 번 맞고 싶다

 

 


師乃云, 大衆아 夫爲法者는 不避喪身失命이니 我二十年에 在黃檗先師處하야 三度問佛法的的大意라가 三度蒙他賜杖하야 如蒿枝拂著相似하니라 如今에 更思得一頓棒喫하니 誰人爲我行得고 時有僧出衆云, 某甲行得이니다 師拈棒與他한대 其僧擬接이어늘 師便打하다


그리고 나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대중들아! 대저 법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몸과 목숨 잃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20년 전에 황벽스님의 회상에 있을 적에 세 번이나 불법의 확실한 대의[佛法的的大意]를 물었다가 세 번이나 황벽스님의 몽둥이 하사하는 것을 얻어맞았다. 그 때 마치 부드러운 쑥대가지로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시 한 번 그 몽둥이를 얻어맞고 싶구나. 누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 주겠는가?”
그때 한 스님이 대중 가운데에서 나와서 말하였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임제스님은 몽둥이를 건네주려고 하고 그 스님은 받으려고 하는데, 임제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강의 ; 그 날 법회에서 대중들이 불법의 대의를 물어오자, 옛날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물으려다가 황벽스님에게 몽둥이를 얻어맞은 기억이 나서 말씀하신 것이다.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爲法忘軀]는 말이 있다. 세존의 6년 고행도 그렇다. 선재동자의 구법행각도 그렇다. 설산동자가 법을 위하여 나찰귀신에게 몸을 던진 예가 그렇다. 임제스님은 법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몸과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불법을 물으러 갔다가 20방망이씩 세 차례나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런대 법을 위한 간절한 마음에서 마치 당시 민속의 하나인 간난 아기에게 잘 성장하기를 축원하는 의식으로 쑥대로써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고 술회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그립다. 누가 나를 위해서 다시한번 그렇게 해 주겠는가?”하고 물었다. 달은 밝고 시원한 바람 부는데 임제스님은 오늘 친 그물에 혹시 고기 한 마리를 건질 수 있을까 해서다. 바로 그때 큼직한 것이 한 마리 걸려들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다. 몽둥이를 건네주려고 하다가 곧바로 후려쳐서 깔끔한 마무리를 했다. 참으로 자비로우시며 자상하시다. 불법대의를 그렇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보인 것이다.

임제록 29


6-1 칼날위의 일

 


上堂에 僧問, 如何是劍刃上事오 師云, 禍事禍事로다 僧擬議한대 師便打하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칼날위의 일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강의 ; 어떤 스님이 칼날위의 일을 물었다. 여기서 칼날위의 일이란 달리 말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요량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를 말한다. 일대사(一大事)며 본분사(本分事)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를 “칼날위의 일”이라고 한 뒤, 대답하라고 하므로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며, 일대사며, 본분사인가? 수행도 붙지 못하는 자리이며, 깨달음도 붙지 못하는 자리인가? 임제스님은 후려쳤지만 나는 “할!”이다.

임제록 30


6-2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

 

 



問, 祇如石室行者가 踏碓忘却移脚은 向什麽處去오 師云, 沒溺深泉이니라 
한 스님이 물었다
“저 석실행자가 방아를 찧다가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니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 버렸다.” 

강의 ; 석실행자는 청원(靑原)스님의 4세손인 석실선도(善道)스님을 말한다. 당나라 무종(武宗,814-846)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일로 인하여 스님은 속복을 입고 살았다. 그 후 법난이 끝나고 불교가 다시 회복되었으나 석실스님은 늘 속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행자(行者)라고 불리게 되었다. 
석실행자는 정진이 순일하여 디딜방아를 찧다가 생각이 끊어져서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특기할만한 일이라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이러한 공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뜻에서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서 죽어버렸다.”라고 했다.
일대사인연을 깊이 참구하다가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그와 같은 무심(無心)의 경지에 든 것도 드문 일이긴 하나 옳은 공부는 아니다. 방아를 찧는 사람이라면 방아를 잘 찧어야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목석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암담하지 않은가. 멀쩡한 사람이 목석이 되다니. 천하의 육조스님도 방아를 찧으며 행자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다리를 옮기는 것을 잊은 적은 없었다.

 

 
 


 

 


 7080 훈훈한 노래모음

01. 사랑은 차가운 유혹 / 양수경
02. 사랑이란 / 이  용
03. 나성에 가면 / 세샘트리오
04. 안개속의 두그림자 / 함중아
05. 벌써 이밤이 지나고 / 안혜지 
06. 철없던 사랑 / 홍수철
07. 새벽비 / 혜은이
08. 카페와 연인 / 김범룡
09. 터질거에요 / 김씨네 
10. 불  티 / 전영록 
11. 빙글빙글 / 나  미
12. 아이스크림 사랑 / 임병수
13. 밤  차 / 이은하
14. 제 2의 고향 / 윤수일
15.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 현이와 덕이 
16. 카멜레온 / 박영규
17. 골목길 / 이재민
18. 흥부가 기가 막혀 / 육각수
19. 핑도는 눈물 / 김승진
20. 어떤이의 꿈 / 봄 여름 가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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