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22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復云, 此日法筵은 爲一大事故니 更有問話者麽아 速致問來하라 儞纔開口하면 早勿交涉也니라 何以如此오 不見가 釋尊云, 法離文字며 不屬因不在緣故라하니라 爲儞信不及일새 所以今日葛藤이라 恐滯常侍與諸官員하야 昧他佛性이니 不如且退니라 喝一喝云, 少信根人은 終無了日이로다 久立珍重하라
임제스님이 다시 말했다.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니 다시 묻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빨리 물어라. 그대들이 막 입을 열면 일대사와는 벌써 교섭할 수 없게 된다. 왜 그럴까? 보지 못했는가.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법은 문자를 떠났으며 인(因)에도 속하지 않고 연(緣)에도 있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믿음이 모자라는 까닭에 오늘 이렇게 어지러이 갈등을 하는 것이다. 왕상시와 여러 관원들을 꽉 막히게 하고 불성을 어둡게 할까 염려된다. 물러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하시며, “할!”을 한 번 하시고는 말했다. “믿음의 뿌리가 적은 사람들은 마침내 일대사의 일을 마칠 날이 없다. 오래 서 있었으니 편히 쉬어라.”
강의 ;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를 밝히기 위해서 열린 것이다. 일대사란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의 실상이요, 제법의 실상이며, 우주와 생명의 실상이다. 그러나 일대사란 무어라고 입을 열면 벌써 틀려버린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법(法)이란, 즉 일대사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수행을 쌓아서 성취하는 물건이 아니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간경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행을 하고 6바라밀을 닦아서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본래로 있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것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이다. 본래 여여(如如)한 것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하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무엇이 모자라는가. 완전무결하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또 이러한 이치를 듣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늘처럼 이렇게 갈등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본래 아무 일이 없는 이 이치에 대하여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일대사를 마칠 날이 없다. 법회 서두에 불교의 대의를 물었을 때 임제스님은 “할”로써 대답하셨다. 굳이 일대사를 표현하라면 나도 “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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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23
2-0 정안(正眼)이란
師因一日에 到河府한대 府主王常侍가 請師陞座하니라 時麻谷出問, 大悲千手眼에 那箇是正眼고 師云, 大悲千手眼에 那箇是正眼고 速道速道하라 麻谷拽師下座하고 麻谷却坐하니 師近前云, 不審이로다 麻谷擬議한대 師亦拽麻谷下座하고 師却坐라 麻谷便出去어늘 師便下座하니라.
임제스님이 어느 날 하북부에 갔더니 부주 왕상시가 스님을 청해서 법좌에 오르게 했다. 그 때에 마곡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인가? 빨리 말하라” 그러자 마곡스님이 임제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마곡스님이 대신 법좌에 올라앉았다. 임제스님은 마곡스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니, 마곡스님이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렸다. 임제스님도 또한 마곡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마곡스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임제스님도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강의 ;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중에 어느 것이 정안(正眼)인가? 하고 물었는데 임제스님은 똑 같은 질문으로 대답하였다. 관음보살에게는 천수 천안뿐만 아니다. 천 손 만 손 팔만 사천 모다라 손이 있고, 천 눈 만 눈 팔만 사천 모다라 눈이 있다. 몇 개의 눈이 있든지 관계없이 이와 같은 형식의 법담은 조사스님들에게 자주 보인다. 능엄경에도 있다. 설법제일의 부루나가 “청정본연(淸淨本然)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겼습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은 똑같이 “청정본연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는가?”라고 되묻는다.
임제스님과 마곡스님이 천수천안의 질문을 주고받은 것과, 법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주고받은 것과 세존과 부루나가 똑 같은 말로 법담을 주고받은 것을 한데 묶어서 저 삼계(三界)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 비록 그것을 부처와 부처의 경계요, 종사와 종사들이 주인과 손을 서로 바꿔가며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무애자재한 경지를 보여준 것이라 하더라도
. 천개의 눈은 그만두고 그대의 한 개의 눈은 어떤가? 이렇게 환하게 보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똑똑히 듣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청정본연하지 않은가? 청정본연하니까 산하대지가 이렇게 있지 않은가? 마곡스님이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나, 임제스님이 바로 법좌에서 내려온 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정한 정안을 보여준 멋진 마무리라고 하겠다. 두 사람이 합작으로 엮어낸 빼어난 법문이다. 선가에서는 그것을 빈주호환(賓主互換)이라고 한다. | |
| 임제록 24
3-0 무위진인(無位眞人)
上堂云, 赤肉團上에 有一無位眞人하야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하나니 未證據者는 看看하라 時有僧出問, 如何是無位眞人고 師下禪牀把住云, 道道하라 其僧擬議한대 師托開云, 無位眞人이 是什麽乾屎橛고하시고 便歸方丈하다
법상에 오라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강의 ; 임제록에서 한 구절만 택하라면 바로 이 무위진인이다. 불교는 달리 표현하면 대해탈(大解脫), 대자유(大自由)를 구가하는 종교다. 그 대자유, 대해탈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무위진인이 답이다. 여기에는 문자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위진인은 이 육신을 근거로 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런대 남녀노소와 동서남북과 재산이 있고 없고, 지위가 있고 없고 에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사람이다. 차별이 있는 사람은 가짜사람이다. 차별이 없는 사람은 참사람이다[차별 없는 참사람]. 대개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하면서. 또 손과 발을 통해서도 출입한다. 그리고 이 사람의 값은 백두산 크기의 백 만개만한 다이아몬드의 값보다도 억 만 배 더 나간다.
그렇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마는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스님이 새삼스럽게 “무위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종로에 서서 “서울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너 무위진인아,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 무위진인은 무위진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한데 어찌된 일인지 무위진인은 대답이 없다. 똥 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을 뒤로 하고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임제스님은 대 해탈, 대 자유의 무위진인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위진인 말고 어디서 대 해탈을 누릴 것인가. 어디서 대 자유를 누릴 것인가. 불교는 이렇게 명료하다. 명명백백, 소소영영 그 자체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마치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듯하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다.
임제일구 치천금(臨濟一句置千金). 임제록의 이 한 구절의 법문이 천금의 값을 한다. 아니 어찌 천금으로 그 값을 대신하겠는가. 만고에 빼어난 말씀이다.
어느 해(1971년) 겨울철 봉암사에서 서옹스님이 임제록을 강의하시면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선사는 전쟁을 맞아 원자폭탄으로 일본열도가 불에 탈 때 “일본이 다 타도 이 임제록 한권만 남아있으면 된다”라고 하였단다. 필자는 이 한마디로써 일본에 사람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일본을 얕보지 않는다. 임제록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얕볼 수 있겠는가. 나는 도반의 절을 방문했을 때 그의 방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족자가 하나만 걸려 있으면 그 도반을 달리 본다. 속으로 두려워하면서 더 친해지고 존경하게 된다. 글씨야 졸필이든 말든 관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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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제록 25
4-1 할, 할, 할
上堂에 有僧出禮拜어늘 師便喝한대 僧云, 老和尙은 莫探頭好로다 師云, 儞道하라 落在什麽處오 僧便喝하니라 又有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禮拜어늘 師云, 儞道하라 好喝也無아 僧云, 草賊大敗로다 師云, 過在什麽處오 僧云, 再犯不容이로다 師便喝하니라
임제스님이 법상에 오르니 한 스님이 나와서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곧 바로 “할”을 하였다. 그 스님이 말했다.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십시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말해 보아라. “할”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 스님이 곧바로 “할”을 했다.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 임제스님이 문득 “할”을 하니, 그 스님은 예배를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한번 말해봐.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 그 스님이 말했다. “초야의 도적[草賊]이 크게 패했습니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스님이 말했다. “두 번 잘못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임제스님이 곧 바로 “할”을 했다. .
강의 ; 임제스님은 역시 할이다. 예배를 드려도 할이요. 불교를 물어도 할이다. 나에게서 불교[無位眞人]외에 다른 것은 찾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만나 불법 외에 주고받을 일이 무엇이 또 있겠는가. 호사가들은 할에도 사람을 떠보는 할과 법을 바로 보이는 할과 상대를 제압하는 할 등등을 말한다. 여기 이 스님도 할의 진정한 뜻을 모르므로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그렇다면 할의 낙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보라.”고 하셨다. 그가 곧 바로 “할”로 답한 것은 잘한 일이다.
곧 이어서 또 한 스님이 나와 불교의 대의를 물었다. 임제스님은 또 “할”로 답하셨다. 그 스님은 “할”에 대한 대응을 예배로 했는데, 임제스님은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하니까 이 스님은 임제스님을 초야의 도적으로 몰아놓고 초야의 도적이 크게 패하였다고 하였다. 임제스님의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라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랬더니 임제스님은 그의 뜻을 받아드려서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선문답에서 말이 딸릴 때 잘 쓰는 “두 번 잘못은 용서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고, 임제스님은 역시 “할”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할”도 실은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도(道)를 표현하고, 법(法)을 표현하고, 불교를 표현하고, 사람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간단명료한 방법이다. 불교는 이렇게 간단명료하다. 먼지 하나 붙지 않은 자리다. 이 “할”에 무슨 이론이나 수행이나 깨달음이 붙을 수 있겠는가. 본래로 불교공부란 문자와 이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행하고 증득하고 깨닫고 하는 것과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써 으뜸을 삼고 최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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