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스님 이야기

2019. 12. 8. 16: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시 [禪詩]

728x90


진묵스님 이야기



진묵(震默)스님 (1562∼1633)


 조선 중기의 승려. 호 : 진묵 법명: 일옥(一玉)

출생지는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이다.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베개 삼아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촌;
달은 촛불,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동이 되네
大醉居然仍起舞: 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해서 거연히 일어나 춤추니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 진묵스님의 詩


조사단 주련을 바라보며 진묵대사 어머니 묘지를 우러른다.


“나 죽기 전에 자식 하나만 낳아 달라.”

한 어머님의 말씀에

“만년 향화자리에 어머니 묘지를 써 다달이 추모의 재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해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하였다.

과연 스님 가신 지 3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떤 열사의 묘지보다도

더 아담하고 깨끗하게 가꾸어진 진묵대사 어머니 묘지는

천만대중이 우러르는 성지로 변해가고 있다.

스님의 이름은 일옥이고 호는 진묵이며 만경 불거촌 사람이다.

어머니는 조의씨인데 대사가 태어났을 때 주위의 풀 나무들이

3년 동안 마르고 시들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이에 큰 사람이 날 징조다.”하였다.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성이 지혜롭고 사랑스러워 불거촌에 생불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7세에 전주 서방산 봉서사에 들어가 내전을 익혔는데 속속들이

그 내용을 알고 이해하고 눈으로 보기만 하면 외워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 대중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작은 사미로만 보았다.

주지 스님께서 부전일을 맡겨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과 신중님께 향 사르고

예배하자 오래지 않아 주지스님 꿈에 “저희들 작은 신들이

큰스님 부처님께 예배를 받으니 죄송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부터는 큰스님께서 예배하시지 말라 하여 주십시오” 하여

대중들이 입을 모아 “부처님께서 거듭 태어나셨다”고 하였다.

봉서사 5리 밖에 봉곡선생님 집이 있었는데 봉곡선생은

사계(沙溪)선생의 높은 제자였다. 서로 왕래하면서 방외(方外)의 도리를

주고받으니 괴이한 사람들이라 하였다.

하루는 선생님 집에서 강목(綱目) 한 부질을 빌려 일꾼에게 짊어지게 하고

절로 돌아오는데 오면서 책을 한 권씩 한 권씩 빼어 보고, 보고 나서는

길거리에다 책을 버렸다.

절에까지 오고 나니 한 권도 남지 않는지라 일꾼이 물었다.

“어찌하여 남의 책을 길거리에 함부로 버리십니까?”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은 버려야 되지 않겠느냐.”

할말이 없었다. 일꾼이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흩어진 책들을 주어가지고 와서

봉곡선생에게 말씀드리자 봉곡선생님은 후일 스님을 모셔 그 책 내용을 물었다.

“무엇은 무엇이고 무엇은 무엇인데 스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하니

스님께서는 글자 한자도 틀리지 않게 그 모든 강목을 다 외우고 있었다.

이에 놀라 소문을 퍼뜨리니 스님의 도력이 널리 사해에 퍼지게 되었다.

하루는 봉곡선생이 여자 노비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마련하여 보냈다.

그런데 길거리서 스님을 만나니 스님께서 허공을 바라보고 섰다가 말했다.

“너 아기 가지고 싶으냐?”

노비가 대답이 없자

“박복한 중생 할 수 없구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헛되이 샐까봐 멀리 허공 밖으로 물리쳤다.

두 분이 이렇게 서로 만나 말없는 가운데 정을 통하였다.

스님께서 사미로 있을 때 창원 마상포를 지나가는데 한 동녀가 보고 사정하였다.



“스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출가사문이 어찌 여자를 데리고 살 수 있겠느냐.”

형편이 어쩔 수 없는지라 여인은 죽어서 남자로 태어나 마침내 전주 대원사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름을 기춘(奇春)이라 불렀다. 스님께서 그를 시봉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이락삼매(離樂三昧)에 빠졌다.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이 진여 속에 유독 빛나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대중들이 말했다.

“기춘을 위해 한턱내십시오.”

“그래 그렇게 하지.”하고

“대중들은 발우를 펴고 국수 먹을 준비를 하라.”하였다.

대중들이 발우를 펴자 스님께서는 기춘에게 바늘 하나씩을 돌려 바리때 속에

놓도록 하고 물을 따른 뒤 젓가락으로 저으라 하자 즉시 발우 속에

국수가 가득하여 넉넉하게 먹었다.

스님께서 일출암에 계실 때 어머니를 왜막촌에 모시고 있었는데 모기 때문에

고생을 하자 스님께서 산신령을 불러 야단을 쳤다.

“너는 부모도 없느냐. 우리 어머니를 왜 이리 괴롭히느냐?”

이에 놀란 산신령이 모든 모기를 다른 곳으로 몰아내어

지금까지도 왜막촌에는 모기가 없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만경 북쪽 유앙산에 장사지내고

“누구고 이곳을 청소하고 절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풍농(?農)의 이익을 얻으리라.”

하여 원근촌 사람들이 다투어 음식을 올리고 묘역을 보살펴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향화가 그치지 않고 있다.

스님께서는 늘 곡차를 즐겨 마셨는데 술이라 하면 들지 않았다.

하루는 한 스님께서 술을 거르자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지라 가서 물었다.

“무엇 하는가?”

“술 거릅니다.”

스님께서는 아무말없이 돌아왔다. 또 가서 물었다.

“무엇 하는가?”

전과 같이 대답하자 무료히 돌아왔다가 잠시 후 다시 가서 물었다.

스님이 끝내(미워라고) 곡차라고 답하지 않고 술을 거른다고 대답하자

스님께서는 희망을 잃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금강역사가 철퇴를 휘둘러 술 거르던 스님을 내려쳤다.

스님께서 변산 월명암에 계실 때 시자 한 사람만 남기고 대중스님들은

모두 탁발을 나갔다. 그때 시자가 기고(忌故)가 있어 속가에 가면서

“공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으니 때가 되면 잡수십시오.” 하고 떠났다.

그런데 그때 스님은 능엄경을 보시면서 “오냐 잘 다녀오너라” 하여

이튿날 다녀와서 보니 밥도 탁자에 그대로 있고 스님의 손가락이 문지방에

끼어 피가 흘렀는데도 모르고 경을 읽고 있었다. 시자가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문안하니

“아니 속가에 간다더니 언제 왔느냐.”

도리어 물었다. 하룻밤 하루 낮을 능엄삼매에 빠져들어 그대로 지내신 것이다.

매일 저녁 동쪽으로부터 밝은 별빛이 비쳐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청량산 목부암의 장명등이었다.

스님께서 드디어 그곳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그곳에는 16나한이 있어

항상 스님을 시봉하였다. 불빛이 멀리 월명암까지 비친 것은 아마 나한님들이

큰스님에게 자신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일 것이다.

전주에 은둔하여 사는 한 아전이 있었다. 그는 평소 대사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관청의 물품들을 사사롭게 소비하고 장차 도망가고자

대사에게 와서 물었다. 대사가 말했다.

“관물을 축내고 도망간다면 어떻게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겠느냐.

집에 돌아가 두어말 공양미를 가지고 와서 이곳 나한님께

기도를 드리면 좋은 방법이 나올 것이다.”

아전이 돌아가 쌀을 준비해 가지고 왔다. 스님께서 시자를 시켜

공양을 지어 나한님께 올리도록 하고 아전에게 물었다.

“부중(府中)에 혹 빈자리가 있는가?”

“예. 형리(刑吏)가 있기는 합니다만 월급이 박하고 무료한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자청하여 맡되 30일을 넘기지 말라.”

아전이 돌아가자 대사는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으로 들어가 차례대로

나한님 머리를 두들기면서 “아전의 일을 도와주라” 부탁하였다.

이튿날 밤 나한들이 아전의 꿈에 나타나 꾸짖었다.

“그대가 원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말할 일이지 어찌하여

큰스님께 말씀드려 우리들을 괴롭히느냐. 너로 보아서는 돌볼 수 없지만

스승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도와준다.”

아전은 이 꿈을 꾸고 자청하여 형리가 되었다.

30일 동안 축낸 관물을 보충해놓고 다른 아전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다른 아전은 뇌물죄로 그만 구금되고 말았다.

하루는 스님께서 홀로 길을 걸어가다가 한 사미를 만나 낙수천 가에 이르렀다.

“네가 먼저 건너가 물이 깊고 얕은 것을 알아보라.”하니

사미가 가볍게 건너가자 스님께서는 안심하고 몸을 물에 넣었다가

깊이 빠지게 되자 사미가 붙잡아 건져주었다.

그때서야 나한들이 장난한 것을 알고 한 게송을 읊었다.

그대 영축산의 미련한 나한들아

마음속의 잿밥 언제나 쉬려느냐.

신통 묘용은 비록 따르기 어려우나

대도는 마땅히 나에게 물으리라.

스님께서 개천가에 이르니 어린아이들이 천렵을 하여 물고기를

끓이고 있었다. 스님께서 끓는 솥을 들여다보고

“발랄한 고기들이 죄 없이 삶아지는구나.”

탄식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며 말했다.

“스님께서도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주면 잘 먹지.”

“그럼 저 한 솥을 스님께 맡기겠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스님께서는 입을 솥 가에 대고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이에 소년들이 모두 놀라 이상히 여기면서 말했다.

“부처님은 살생을 금지하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고깃국을

마시고도 스님이라 할 수 있습니까?”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살려주기는 내가 하겠다.”하고

마침내 옷을 벗고 물가에 등을 돌려 설사하니 무수한 물고기들이

항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봄물을 타고 금빛을 번쩍거리며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스님이 말씀하였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저 강가로 가서 다시는 미끼에 걸려

가마솥에 삶아지는 고통을 격지 말아라.”

이에 모든 소년들은 탄식하고 그물을 거두어 가지고 갔다.

하루는 스님께서 봉서사에 계실 때 시자를 불러 명령하였다.

“소금을 가지고 부곡으로 가거라.”

“가서 누구에게 줄까요.”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재를 넘어 골짜기를 내려가니 사냥꾼들이 방금

노루를 잡아 회를 쳐 가지고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오자

“이는 필시 옥노(玉老;진묵대사)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보내주신 것이다” 하고 감사하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물을 찾아서 미지근한 쌀뜨물을 갖다 드리니

그것을 받아 입에 머금었다가 동쪽을 향해 내뿜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나서 다 탈 뻔하였는데 갑자기

뿌연 뜨물비가 내려 불을 꺼주었다. 알고 보니 그 시간이 바로

노스님께서 뜨물을 입에 머금었다 내뿜은 시간이었다.

한번은 스님께서 봉서사 뒤 상운암에 계실 때 탁발승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멀리 나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스님의 얼굴에 거미줄이 처져있고 무릎사이에 까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먼지를 쓸어내고 거미줄을 거두어 낸 뒤

“스님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하니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하고 물었다.


또 스님께서 대원사에 계실 때 밥 때가 되면 밀기울만 물에 타서 잡수셨다.

대중들은 그것이 싫어서 박대하여 공양도 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러운 것으로 밀기울을 더럽혔다. 그런데 그때 한 스님이 허공 가운데서

밥 발우를 가지고 내려와 스님께 드리니 스님께서는

“밥을 받는 것은 좋으나 멀리서 이렇게 까지 수고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밥을 가지고 온 스님이 말했다.

“저는 해남 대둔사 스님입니다. 밥 때가 되어 막 발우에 밥을 퍼놓았는데

갑자기 발우가 공중으로 떠 붙잡으니 제 몸까지 따라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아침저녁으로 스님께 공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 좋을대로 하게.”

이렇게 하여 장장 4년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발우가 왔다 갔다 하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7대에 걸쳐 액운을 만날 것이다.”

과연 대원사는 그렇게 좋은 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천계 임술년(1622) 완주(전주) 송광사와 홍산(충성) 무량사에서 똑같이

불상을 모시고 같은 시간에 점안식을 하고자 증사로 스님을 청하였다.

어느 쪽만 갈 수 없으므로 스님께서는 각각 증물(證物)을 주어 단위에 올려놓고

작용을 관하라 하고 당부하였다.

“무량사의 화주는 불상이 점안되기 전에는 절대로 절 문밖에 나가지 말라.”

그래서 송광사에서는 주장자를 증사단에 세워놓았는데 밤낮없이 꼿꼿이

서서 넘어지지 않았으며, 무량사에서는 염주를 증사석에 놓아두었는데

염주가 계속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무량사에서 홍성에 사는 어떤 사람이 불상 조성금을 단독으로

내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받고자 화주가 일주문 밖에까지 나갔다가

갑옷을 입은 신장님께 매를 맞아 죽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목욕하고 머리 깎고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끌고

개울가에 나가 물가에 주장자를 세우고 손으로 물 속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했다.

“저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너는 단지 스승만 알았지 진짜 석가는 모르는구나.”

드디어 방으로 들어와 앉아서 제자를 불렀다.

“내 이제 가고자 하니 무엇이고 물을 것이 있으면 물으라.”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 백년 후에는 누구를 의지하여 종사를 삼을까요?”

“종승은 무슨 종승이냐.”

“그래도 종승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사가 마지못하여 말씀하였다.

“명리승이지만 그래도 정장로(靜長老:휴정)에게 붙여주어라.”

드디어 편안히 입적하시니 때는 1632년 계유 10월28일로

세수는 72세이고 법랍은 52세였다.

- 염기영님 제공


 

진묵 스님의 조카 이야기

석가모니불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던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 진묵대사

(震默大師: 1562-1633)는 많은 이적을 남기신 대도인이었다.

스님에게는 누이 동생이 하나 있었고,누이 동생이 낳은 외동 아들은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이 조카가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복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스님은 7월 칠석날 조카 내외를 ?아가 단단히 일러주었다.
 

"얘들아, 오늘밤 자정까지 일곱 개의 밥상을 차리도록 해라.

내 특별히 칠성님들을 모셔다가 복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주마."

진묵스님이 신통력을 지닌 대도인임을 아는 조카는

'삼촌이 잘 살게 해주리라' 확신하고 열심히 손님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당에다

자리를 펴고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렸다.

밤 12시 정각이 되자 진묵스님이 일곱 분의 손님을 모시고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거룩한 모습의 칠성님은 아니었다.
한 분은 째보요 한 분은 곰보, 절름발이요 곰배팔이요 장님이요 귀머거리들 이었다.
거기에다 하나같이 눈가에는 눈곱이 잔뜩 붙어있고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삼촌도 참, 어디서 저런 거지 영감들만 데리고 왔노?

쳇, 덕을 보기는 다 틀려버렸네'

조카 내외는 기분이 크게 상하여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솥뚜껑을 쾅쾅 여닫고 바가지를 서로 부딪히고 깨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진묵스님의 권유로 밥상 앞에 앉았던 칠성님들은 하나, 둘

차례로 일어나 떠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칠성님까지

일어서려 하는데 진묵스님이 다가가 붙잡고 통사정을 하였다.

"철없고 박복한 조카가 아니라, 나를 봐서 한 숟갈이라도 드십시오."
일곱번째 칠성은 진묵스님의 체면을 보아 밥 한술을 뜨고 국 한 숟갈을 먹고

반찬 한 젓가락을 집어 드신 다음 떠나갔다.

그때 진묵스님은 조카를 불러 호통을 쳤다.
"에잇, 이 시원치 않은 놈! 어찌 너는 하는 짓마다 그모양이냐?

내가 너희를 위해 칠성님들을 청하였는데,손님들 앞에서 그런 패악을 부려 다

그냥 가시도록 만들어?  도무지 복 지을 인연조차 없다니 한심하구나"
그리고 돌아서서 집을 나오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래도 마지막 목성대군이 세 숟갈을 잡수셨기 때문에

앞으로 3년은 잘 살 수 있을게다."

이튿날 조카는 장에 나갔다가 돼지 한 마리를 헐값에 사 왔는데,

이 돼지가 며칠 지나지 않아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았고, 몇 달이 지나자

집안에는 돼지가 가득하게 되었다. 또 돼지들을 팔아 암소를 샀는데,

그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한꺼번에 낳았다.

이렇게 하여 진묵스님의 조카는 3년 동안 아주 부유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만 3년째 되는 날 돼지우리에서 불이 나더니,불이 소 외양간으로

 옮겨붙고 다시 안채로 옮겨 붙어,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말았다.
3년의 복이 다하자 다시 박복하기 그지없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다소는 전설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몇가지 교훈을 새겨볼 수 있다.

첫째는 복을 구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복은 특별한 권능자가 내리는

것이아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그 어떠한 신도 무조건 복을 줄 수가 없다.
이 복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 복을 담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갖추어져 있고,또 정성을 다하면 저절로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칠성님이 오신다기에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던 진묵스님 조카의

마음은 성심(誠心)이 아니라 '기대심리'였고, 상대가 거룩하지 않게 보이자

기대심리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기분마져 상해 칠성님들을 쫓는

박복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러한 짓은 진묵스님의 조카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이렇게 처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찌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고 기분따라 움직이는 자가 큰 복을 담을 수 있으랴.

또 한 가지, 모든 복에는 정해진 수명이 있다. 복이 다하면 기울기 마련인 것이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에 비유하셨다.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이 올라가고 있을 때는 기세도 좋고 보기도 좋지만,

그 힘이 다하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서 우리도 올라가고 있을 때 인연을 소중히 하고 복을 닦아야 한다.

요즈음
우리는 부자로 지내던 사람이 일순간에 파산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실로 안타까운 사연도 많지만,인연법에서 보면 부자로 살 연이 다하여

그렇게 되는것이다. 재물뿐만이 아니다.

명예도 권력도 수명도 인연이 다하면 하루 아침에 사라지게 된다.

이 나라에 찾아왔던IMF사태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인과응보이다.

사치.낭비.거품.정직하지 못한 삶....참으로 인연법을 잊은 채 살았기 때문에

도래한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인연법으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인연이다. 인연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고,

인연이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다. 인연이기 때문에 또다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 일타스님의 불자의 마음가짐과 수행법에서



세월은 홀연히 지나가서...


세월은 회오리바람처럼 홀연히 지나가서

모르는 사이에 늙음을 매혹한다.

마음을 아직 닦지도 못했는데

잠깐 사이에 죽음이 가까워졌네.


歲月飄忽  暗催老相  心地未修  漸近死門

세월표홀    암최로상   심지미수    점근사문


- 보조법어

 

* 스님은 자신을을 경책하면서 他人들을 깨우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리므로

진리를 탐구하는사람들에게는 인생의 하루하루가 금쪽같다.

시간에 떠밀려 가기보다 자신의 의지로 연소시켜야 할 것이다.





      무상(無常)의 법칙


      태어나고 소멸하는 무상의 법칙은

      찰나에도 보존하기 어렵다.

      돌이 부딪쳐 일어나는 불이며, 바람 앞에 등불이며,

      잦아드는 물결이며, 저물어 가는 석양이다.


      生滅無常  刹那難保  石火風燈  逝波殘照

      생멸무상  찰나난보  석화풍등  서파잔조


      - 보조법어  


      * 죽음이란 알고 보면 찰나찰나 진행되고 있다.

      사실은 한 찰나도 멈추거나 붙들어 맬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지금부터 백년 뒤에 우리들이 현재 각축하고 아웅다웅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라도 가끔 하면서 살아야 한다.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베개 삼아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촌;
      달은 촛불,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동이 되네
      大醉居然仍起舞: 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해서 거연히 일어나 춤추니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 진묵스님의 詩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점차(漸次)


점차가 없는 가운데 점차가 있는 것이요.

공용이 없는 가운데 공용이 있는 것이다.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

 무점차중점차    무공용중공용


- 보조 법어  


* 본래 부처인 것이지 하루하루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보조 스님은 “점차가 없는 가운데 점차다.”라고 하였다.

점차가 이렇게라도 있다면 그 점차에 들어가는 공부를

“공용 없는 공용이다.”라고 하였다.  / 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