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승려. 호 : 진묵 법명: 일옥(一玉)
출생지는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이다.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베개 삼아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촌;
달은 촛불,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동이 되네
大醉居然仍起舞: 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해서 거연히 일어나 춤추니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 진묵스님의 詩
조사단 주련을 바라보며 진묵대사 어머니 묘지를 우러른다.
“나 죽기 전에 자식 하나만 낳아 달라.”
한 어머님의 말씀에
“만년 향화자리에 어머니 묘지를 써 다달이 추모의 재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해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하였다.
과연 스님 가신 지 3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떤 열사의 묘지보다도
더 아담하고 깨끗하게 가꾸어진 진묵대사 어머니 묘지는
천만대중이 우러르는 성지로 변해가고 있다.
스님의 이름은 일옥이고 호는 진묵이며 만경 불거촌 사람이다.
어머니는 조의씨인데 대사가 태어났을 때 주위의 풀 나무들이
3년 동안 마르고 시들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이에 큰 사람이 날 징조다.”하였다.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심성이 지혜롭고 사랑스러워 불거촌에 생불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7세에 전주 서방산 봉서사에 들어가 내전을 익혔는데 속속들이
그 내용을 알고 이해하고 눈으로 보기만 하면 외워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 대중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작은 사미로만 보았다.
주지 스님께서 부전일을 맡겨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과 신중님께 향 사르고
예배하자 오래지 않아 주지스님 꿈에 “저희들 작은 신들이
큰스님 부처님께 예배를 받으니 죄송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부터는 큰스님께서 예배하시지 말라 하여 주십시오” 하여
대중들이 입을 모아 “부처님께서 거듭 태어나셨다”고 하였다.
봉서사 5리 밖에 봉곡선생님 집이 있었는데 봉곡선생은
사계(沙溪)선생의 높은 제자였다. 서로 왕래하면서 방외(方外)의 도리를
주고받으니 괴이한 사람들이라 하였다.
하루는 선생님 집에서 강목(綱目) 한 부질을 빌려 일꾼에게 짊어지게 하고
절로 돌아오는데 오면서 책을 한 권씩 한 권씩 빼어 보고, 보고 나서는
길거리에다 책을 버렸다.
절에까지 오고 나니 한 권도 남지 않는지라 일꾼이 물었다.
“어찌하여 남의 책을 길거리에 함부로 버리십니까?”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은 버려야 되지 않겠느냐.”
할말이 없었다. 일꾼이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흩어진 책들을 주어가지고 와서
봉곡선생에게 말씀드리자 봉곡선생님은 후일 스님을 모셔 그 책 내용을 물었다.
“무엇은 무엇이고 무엇은 무엇인데 스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하니
스님께서는 글자 한자도 틀리지 않게 그 모든 강목을 다 외우고 있었다.
이에 놀라 소문을 퍼뜨리니 스님의 도력이 널리 사해에 퍼지게 되었다.
하루는 봉곡선생이 여자 노비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마련하여 보냈다.
그런데 길거리서 스님을 만나니 스님께서 허공을 바라보고 섰다가 말했다.
“너 아기 가지고 싶으냐?”
노비가 대답이 없자
“박복한 중생 할 수 없구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헛되이 샐까봐 멀리 허공 밖으로 물리쳤다.
두 분이 이렇게 서로 만나 말없는 가운데 정을 통하였다.
스님께서 사미로 있을 때 창원 마상포를 지나가는데 한 동녀가 보고 사정하였다.
“스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출가사문이 어찌 여자를 데리고 살 수 있겠느냐.”
형편이 어쩔 수 없는지라 여인은 죽어서 남자로 태어나 마침내 전주 대원사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름을 기춘(奇春)이라 불렀다. 스님께서 그를 시봉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이락삼매(離樂三昧)에 빠졌다.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이 진여 속에 유독 빛나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대중들이 말했다.
“기춘을 위해 한턱내십시오.”
“그래 그렇게 하지.”하고
“대중들은 발우를 펴고 국수 먹을 준비를 하라.”하였다.
대중들이 발우를 펴자 스님께서는 기춘에게 바늘 하나씩을 돌려 바리때 속에
놓도록 하고 물을 따른 뒤 젓가락으로 저으라 하자 즉시 발우 속에
국수가 가득하여 넉넉하게 먹었다.
스님께서 일출암에 계실 때 어머니를 왜막촌에 모시고 있었는데 모기 때문에
고생을 하자 스님께서 산신령을 불러 야단을 쳤다.
“너는 부모도 없느냐. 우리 어머니를 왜 이리 괴롭히느냐?”
이에 놀란 산신령이 모든 모기를 다른 곳으로 몰아내어
지금까지도 왜막촌에는 모기가 없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만경 북쪽 유앙산에 장사지내고
“누구고 이곳을 청소하고 절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풍농(?農)의 이익을 얻으리라.”
하여 원근촌 사람들이 다투어 음식을 올리고 묘역을 보살펴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향화가 그치지 않고 있다.
스님께서는 늘 곡차를 즐겨 마셨는데 술이라 하면 들지 않았다.
하루는 한 스님께서 술을 거르자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지라 가서 물었다.
“무엇 하는가?”
“술 거릅니다.”
스님께서는 아무말없이 돌아왔다. 또 가서 물었다.
“무엇 하는가?”
전과 같이 대답하자 무료히 돌아왔다가 잠시 후 다시 가서 물었다.
스님이 끝내(미워라고) 곡차라고 답하지 않고 술을 거른다고 대답하자
스님께서는 희망을 잃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금강역사가 철퇴를 휘둘러 술 거르던 스님을 내려쳤다.
스님께서 변산 월명암에 계실 때 시자 한 사람만 남기고 대중스님들은
모두 탁발을 나갔다. 그때 시자가 기고(忌故)가 있어 속가에 가면서
“공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으니 때가 되면 잡수십시오.” 하고 떠났다.
그런데 그때 스님은 능엄경을 보시면서 “오냐 잘 다녀오너라” 하여
이튿날 다녀와서 보니 밥도 탁자에 그대로 있고 스님의 손가락이 문지방에
끼어 피가 흘렀는데도 모르고 경을 읽고 있었다. 시자가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문안하니
“아니 속가에 간다더니 언제 왔느냐.”
도리어 물었다. 하룻밤 하루 낮을 능엄삼매에 빠져들어 그대로 지내신 것이다.
매일 저녁 동쪽으로부터 밝은 별빛이 비쳐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청량산 목부암의 장명등이었다.
스님께서 드디어 그곳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그곳에는 16나한이 있어
항상 스님을 시봉하였다. 불빛이 멀리 월명암까지 비친 것은 아마 나한님들이
큰스님에게 자신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일 것이다.
전주에 은둔하여 사는 한 아전이 있었다. 그는 평소 대사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관청의 물품들을 사사롭게 소비하고 장차 도망가고자
대사에게 와서 물었다. 대사가 말했다.
“관물을 축내고 도망간다면 어떻게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겠느냐.
집에 돌아가 두어말 공양미를 가지고 와서 이곳 나한님께
기도를 드리면 좋은 방법이 나올 것이다.”
아전이 돌아가 쌀을 준비해 가지고 왔다. 스님께서 시자를 시켜
공양을 지어 나한님께 올리도록 하고 아전에게 물었다.
“부중(府中)에 혹 빈자리가 있는가?”
“예. 형리(刑吏)가 있기는 합니다만 월급이 박하고 무료한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자청하여 맡되 30일을 넘기지 말라.”
아전이 돌아가자 대사는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으로 들어가 차례대로
나한님 머리를 두들기면서 “아전의 일을 도와주라” 부탁하였다.
이튿날 밤 나한들이 아전의 꿈에 나타나 꾸짖었다.
“그대가 원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말할 일이지 어찌하여
큰스님께 말씀드려 우리들을 괴롭히느냐. 너로 보아서는 돌볼 수 없지만
스승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도와준다.”
아전은 이 꿈을 꾸고 자청하여 형리가 되었다.
30일 동안 축낸 관물을 보충해놓고 다른 아전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다른 아전은 뇌물죄로 그만 구금되고 말았다.
하루는 스님께서 홀로 길을 걸어가다가 한 사미를 만나 낙수천 가에 이르렀다.
“네가 먼저 건너가 물이 깊고 얕은 것을 알아보라.”하니
사미가 가볍게 건너가자 스님께서는 안심하고 몸을 물에 넣었다가
깊이 빠지게 되자 사미가 붙잡아 건져주었다.
그때서야 나한들이 장난한 것을 알고 한 게송을 읊었다.
그대 영축산의 미련한 나한들아
마음속의 잿밥 언제나 쉬려느냐.
신통 묘용은 비록 따르기 어려우나
대도는 마땅히 나에게 물으리라.
스님께서 개천가에 이르니 어린아이들이 천렵을 하여 물고기를
끓이고 있었다. 스님께서 끓는 솥을 들여다보고
“발랄한 고기들이 죄 없이 삶아지는구나.”
탄식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며 말했다.
“스님께서도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주면 잘 먹지.”
“그럼 저 한 솥을 스님께 맡기겠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스님께서는 입을 솥 가에 대고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이에 소년들이 모두 놀라 이상히 여기면서 말했다.
“부처님은 살생을 금지하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고깃국을
마시고도 스님이라 할 수 있습니까?”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살려주기는 내가 하겠다.”하고
마침내 옷을 벗고 물가에 등을 돌려 설사하니 무수한 물고기들이
항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봄물을 타고 금빛을 번쩍거리며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스님이 말씀하였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저 강가로 가서 다시는 미끼에 걸려
가마솥에 삶아지는 고통을 격지 말아라.”
이에 모든 소년들은 탄식하고 그물을 거두어 가지고 갔다.
하루는 스님께서 봉서사에 계실 때 시자를 불러 명령하였다.
“소금을 가지고 부곡으로 가거라.”
“가서 누구에게 줄까요.”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재를 넘어 골짜기를 내려가니 사냥꾼들이 방금
노루를 잡아 회를 쳐 가지고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오자
“이는 필시 옥노(玉老;진묵대사)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보내주신 것이다” 하고 감사하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물을 찾아서 미지근한 쌀뜨물을 갖다 드리니
그것을 받아 입에 머금었다가 동쪽을 향해 내뿜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나서 다 탈 뻔하였는데 갑자기
뿌연 뜨물비가 내려 불을 꺼주었다. 알고 보니 그 시간이 바로
노스님께서 뜨물을 입에 머금었다 내뿜은 시간이었다.
한번은 스님께서 봉서사 뒤 상운암에 계실 때 탁발승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멀리 나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스님의 얼굴에 거미줄이 처져있고 무릎사이에 까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래서 먼지를 쓸어내고 거미줄을 거두어 낸 뒤
“스님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하니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하고 물었다.
또 스님께서 대원사에 계실 때 밥 때가 되면 밀기울만 물에 타서 잡수셨다.
대중들은 그것이 싫어서 박대하여 공양도 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러운 것으로 밀기울을 더럽혔다. 그런데 그때 한 스님이 허공 가운데서
밥 발우를 가지고 내려와 스님께 드리니 스님께서는
“밥을 받는 것은 좋으나 멀리서 이렇게 까지 수고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밥을 가지고 온 스님이 말했다.
“저는 해남 대둔사 스님입니다. 밥 때가 되어 막 발우에 밥을 퍼놓았는데
갑자기 발우가 공중으로 떠 붙잡으니 제 몸까지 따라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아침저녁으로 스님께 공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 좋을대로 하게.”
이렇게 하여 장장 4년 동안을 아침저녁으로 발우가 왔다 갔다 하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7대에 걸쳐 액운을 만날 것이다.”
과연 대원사는 그렇게 좋은 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천계 임술년(1622) 완주(전주) 송광사와 홍산(충성) 무량사에서 똑같이
불상을 모시고 같은 시간에 점안식을 하고자 증사로 스님을 청하였다.
어느 쪽만 갈 수 없으므로 스님께서는 각각 증물(證物)을 주어 단위에 올려놓고
작용을 관하라 하고 당부하였다.
“무량사의 화주는 불상이 점안되기 전에는 절대로 절 문밖에 나가지 말라.”
그래서 송광사에서는 주장자를 증사단에 세워놓았는데 밤낮없이 꼿꼿이
서서 넘어지지 않았으며, 무량사에서는 염주를 증사석에 놓아두었는데
염주가 계속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무량사에서 홍성에 사는 어떤 사람이 불상 조성금을 단독으로
내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받고자 화주가 일주문 밖에까지 나갔다가
갑옷을 입은 신장님께 매를 맞아 죽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목욕하고 머리 깎고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끌고
개울가에 나가 물가에 주장자를 세우고 손으로 물 속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했다.
“저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너는 단지 스승만 알았지 진짜 석가는 모르는구나.”
드디어 방으로 들어와 앉아서 제자를 불렀다.
“내 이제 가고자 하니 무엇이고 물을 것이 있으면 물으라.”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 백년 후에는 누구를 의지하여 종사를 삼을까요?”
“종승은 무슨 종승이냐.”
“그래도 종승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사가 마지못하여 말씀하였다.
“명리승이지만 그래도 정장로(靜長老:휴정)에게 붙여주어라.”
드디어 편안히 입적하시니 때는 1632년 계유 10월28일로
세수는 72세이고 법랍은 52세였다.
- 염기영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