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1. 20:36ㆍ일반/금융·경제·사회
-박근혜 정부가 강남 부동산 폭등에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월요 경제학] 폭력의 극단화에 대한 프란츠 파농의 해답
오패산 터널 근처 사제 총기로 경찰관 살해 사건 많은 사람들에 큰 충격 줘
폭력의 양상 왜 극단으로 치닫나?
프란츠 파농이라는 프랑스 사상가 생각나
왜 민중들이 곤혹한 시기에 폭력이 거칠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프란츠 파농 사상으로 다시 한번 살펴 보려해
오패산 총격 사건의 범인은 과거에 전과도 많았었고
정신분석학으로 보면 과대망상 증상도 있다는 거죠
9000원이 든 통장 사진을 올리면서 자신을 실업자에 가난뱅이, 왕따다
실패한 인생이다라고 썼다가도 해
정신이 정상이 아닌 건 분명해 보이는데
정신이 약간 정상에서 벗어나신 분들이
굳이 극단적 폭력이라는 걸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 라는 것에 대해서
가장 뛰어난 연구 업적을 가진 사람이 프란츠 파농입니다
파농은 정말로 알제리 독립운동에서 정말로 큰 역할을 한 사람
그래서 파농을 아시는 분들도 파농이 알제리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출신으로 아시는 분이 많아
아니고요. 파농은 마르티니크라는 곳! 프랑스령인데요
카리브 해안에 있는 섬입니다.
그러니까 남아메리카 출신인 거죠
그리고 프랑스령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사람의 국적은 프랑스 사람이었고요
실제로 프랑스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합니다
그리고 알제리로 가서 정신과 의사로 알제리에서 정착을 하죠
그리고 그 뒤에 알제리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기관지 '엘무자히드'라는 신문
여기 프랑스 판에 기고를 하면서 굉장히 유명해져
젊은 나이에 전 세계 흑인 해방 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명성을 얻었고
미국의 유명했던 흑인 운동가 말콤 엑스도 파농의 사상에 열광을 했다고 해요.
실제로 파농의 사상중에 여러 뛰어난 부분들이 있지만
제일 도드라진 부분이 폭력론이라는 겁니다
수직폭력, 수평폭력 이야기가 여기서 나옵니다.
당시 알제리에서는 민중들끼리 치고 받고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옆집 천막에서 애가 운다고 뛰어들어 애를 찔러 죽이고
상점 주인인 외상 안준다는 이유로 상점주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살인, 강간 이런 범죄가 너무 많으니까
프랑스가 당시 알제리를 점령한 상태에서 어떻게 선전을 했냐면
'알제리 민중들은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없이 살인하고 봄죄 성향이 강하다' 이렇게 선전을 해
알제리를 점령하고 있는 자신들이
무너가 교화시키는 것 같은 똥폼을 다잡고 있었던 것
파농이 정신과 의사니까
본인이 1954~1959년까지 6년동안 치료를 한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연구를 한 결과
프랑스쪽에 반격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파농은 어떻게 이야기 하냐면
알제리 민중들이 폭력적인 건 맞다.
그런데 폭력적인 건
저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폭력성을 타고 났기때문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 놈들, 니놈들이 수직폭력을 가하기때문이다.
이;렇게 반격을 시작합니다.
파농은 폭력을 수직폭력과 수평폭력으로 구분을 하는데요.
결국은 민중들이라는게 제국자의자들로부터 받는 수직폭력때문에
너무 삶이 곤궁해지는 거죠.
파농의 표현으로는
'곤궁한 외상' 외부로부터 받는 상처
이 곤궁한 외상이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거에요.
사람이 빈곤의 늪에서 하우적대면
자연히 폭력적이 되는데
그 폭력을 어디다 쓰냐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한테 쓴다는 거죠.
그래서 옆집애를 죽이고, 산점주인을 죽이고...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걸 수평폭력이라고 표현해요.
파농의 분석본질은 이겁니다.
수평폭력은 원래 그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폭력적이기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거에요.
결국은 프랑스인들의 폭력이 즉 수직 폭력이 수평폭력으로 나타난다는 건데
그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굶주림, 집값을 못내 집 주인에게 내 쫓김,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 해골이 앙상한 아이들, 폐쇄된 작업장, 심장 곁을 까마귀 떼처럼 따라다니는 실업자들, 이 속에서 원주민은 매일 살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몇 파운드의 밀가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가난했기때문에 폭력적이라는 겁니다.
수직폭력때문에 수평폭력 의지가 생긴다는 거에요.'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
그래서 파농은 알제리 사람 구제불능이야 이야기했던 유럽 프랑스 사람, 백인들한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웃기지마 니네만 물러나면 다 해결돼.
그리고 알제리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요, 이성을 갖춘 신체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며,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자.
수직폭력을 가하는 제국주의자들을 향해 폭력저항을 시작하자.
이;렇게 주장합니다.
식민주의라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고
더 큰 폭력외에는 무뤂을 꿇지 않기때문에 더욱 더 강력하게 싸워야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파농은 굉장히 열성적으로 알제리 사람들 독립운동에 참여를 합니다.
안타깝게도
파농이 1961년에 백혈병으로 죽습니다.
나이도 굉장히 젊었어요. 36세였거든요. 너무 아깝죠 . 이 천재가요.
그런데 62년에 알제리가 독립이 됩니다.
파농이 그렇게 꿈꾸었던 알제리의 독립을 딱 1년 앞두고 세상을 떠난거죠.
파농이 61년에 남긴 책 이름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유명한 책인데요.
이게 안타깝게도 유작이 되고 만거죠.
특이한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책도 유명한데
이 책 서문이 유명합니다.
파농이 정말로 존경했던 동지라고 생각했고 스승이라 생각했던
프랑스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쟝폴 사르트르가
이 책 서문을 씁니다.
서문은 인터넷에 나와 있어 굉장히 서문치곤느 무지하게 긴데
정말 명 문장입니다.
사르트르가 파농의 책 서문에
파농의 사상을 이렇게 요약을 해줍니다.
“원주민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매질을 당하고, 영양 부족과 질병,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은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늘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즉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알제리 사람들이 흑인이라서 폭력이 만연했던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이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대접을 받게되면
매질 당하고 영양이 부족하고, 질병공포에 시달리면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모든 인간은 같은 속성을 같게 된다는 거에요.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폭력을 행사하게되고...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명문장으로 평가받는 새르트르의 서문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당시의 제국주의자들은 5억명에 이르는 자신들을 인간이라 분류하고
나머지 15억명은 원주민으로 분류를 한거죠.
그리고 15억명의 원주민들이 수평폭력을 서로 가하고 서로 죽이고
이러는 걸 유럽 백인들은 즐기면서 낄낄대면서 조롱을 하는 겁니다.
자기들은 뭔가 대단하고 우월한 인종인척 하는거죠.
이걸 한국 현실에 대보면 와닿는 것들이 있습니다.
민중들을 끊임없는 빈곤으로 내몬 다음에 지배자들이 위에서 보면서 낄낄대지 않습니까.
' 야! 이 미개한 것들아! 천성이 게으른 놈들아.' 이렇게 조롱을 하죠.
그리고 심지어 지배자들은 수평폭력을 조장합니다.
트럼프가 대표적인 인물이죠. '내가 못 사는 건 멕시코 사람들 때문이다'
'멕시코 사람들을 두들겨 패.' 하고 민중들에게 수평폭력을 가할 것을
선동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수평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지배자들의 수직폭력이라는 것을 감춥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 귀족 노조때문이야, 누구때문이야' 이렇게 서로를 분열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위에서 낄낄대는 겁니다.
' 이 미개한 것들아. 니네들 그러니까 개돼지들이지.' 이러고 웃고 있는거죠.
샤르트릐 서문에 무시무시한 대목이 있는데 사르트르가 이렇게 외칩니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좋은 때다. 비제르타(현재 튀니지의 반자르트), 엘리자베스빌(콩고의 루붐바시), 알제리 벽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마비 상태를 이용하자.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보편성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식칼이라도 충분하다."
저는 한국사회에서 폭력투쟁을 근본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기때문에
한국에 만연한 빈곤과 고단함을 극복하기위해서 샤르트르처럼 식칼을 들자 이렇게 까지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샤르트르의 말처럼
지배계급이 우리의 삶에 손을 댔다면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투쟁을 시작하자라는 샤르트르의 외침에 동의를 합니다.
샤르트르의 서문 하나만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고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하러 일요일 날
뻔뻔스럽게도 서울대병원에 왔죠.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수백만의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그러면 샤르트르의 말대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순수함을 되찾는 것은
우리의 노이로제를 치료하는 방법은 뭐냐면
샤르트르의 표현대로라면 분노가 들끊을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분노하라는 거에요.
그리고 지배계급에게 손을 떼라고 후려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이 다시 돌아옵니다.
분노하고 싸우면서 자기자신으로 되돌아와야지
자신의 자아를 민중들은 스스로 창조한다는 거죠.
사실은 일요일 날 그 장면을보고 화가 많이,났어요.
그 장면을 보고 누가 화가 안났겠어요.
뻔뻔스럽게 서울대병원으로 밀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
그럴수록 분노하고 싸우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어
우리가 접한 수많은 문제의 본질은
수평폭력에 있는게 아니고 수직폭력에 있는거고요.
비록 우리가 식칼을 들자고 말을 하지는 않더라도
주먹은 불끈 쥐고 악랄한 지배계급이 몇년동안
우리에게 가한 폭력들을 더 행사하지 못하도록 싸워야지 우리 스스로
자아를 되찾는 겁니다.
오패산 터널 총기 살해사건을 보면서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까를
한참 고민해보다가
위대한 사상가 프란츠 파농의 폭력론이 한국사회에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소개해
놀라울 만큼의 폭력…우리는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나?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16-10-23 19:38:45
수정 2016-10-23 19:38:45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오패산 터널 총격 사건은 2016년 대한민국의 또 다른 단면이다. 범인이 9000원 밖에 남지 않은 통장을 공개하며 “경찰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는 게 내 목적이다”라는 적었다는 대목에서, 이 놀라운 폭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른다. 그는 스스로 실업자에 가난뱅이, 국민 왕따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조했다.
당연히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휘두르는 이 비정상적 폭력에 대해 한국 사회가 아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할 수는 없다. ‘묻지 마 범죄’는 정말 그 범죄의 원인을 ‘묻지 않아야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 처절하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느냐고 말이다.
오패산 터널 총격사건의 용의자가 지난 11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민중의소리
백성들이 서로에게 휘두르는 비정상적 폭력에 대해 20세기 이후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을 내놓은 이는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이다. 파농은 민중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평폭력의 원인은 바로 그들을 위에서 짓누르는 수직폭력에 있다고 설파했다. 파농에게 수평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당연히 그 수직폭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알제리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파농
파농이 알제리 독립 운동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아프리카 출신으로 오해를 한다. 하지만 파농이 태어난 곳은 카리브 해안에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였다.
프랑스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알제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정착한 파농은 그 누구보다도 알제리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파농의 사상 중 가장 도드라진 부분은 ‘폭력론’이다. 당시 알제리에서는 크고 작은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민중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천막에 돌아온 알제리 민중은, 옆 천막에서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아기를 찔러 죽였다. 더 이상 외상 주기를 거부하는 상점 주인을 야밤에 찾아가 찔러 죽인 사건도 있었다.
프랑스는 당시 알제리의 이런 폭력성을 몹시 증오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알제리 민중들을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 없이 살인하고 범죄 성향이 강하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인 파농은 이에 대해 신랄한 반격을 가했다. 1954~1959년 자신이 직접 치료한 환자들의 치료기록을 바탕으로 파농은 “알제리 민중들의 폭력성의 원인은 바로 프랑스인들이 가하는 수직폭력 탓”이라고 반격했다.
파농은 폭력을 수평폭력과 수직폭력으로 구분했다. 민중들은 결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받는 수직폭력으로 곤궁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곤궁한 외상(外傷)이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민중들은 수평폭력에 유혹을 받는다. 자기보다 못 하거나 약한 사람을 죽이고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받은 수직폭력의 한과 고통을 푸는 것이다. 이 폭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알제리 민중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유 없이 살인하는 유전자를 타고 나지 않았다. 잠시 파농의 말을 따라가 보자.
“굶주림, 집값을 못내 집 주인에게 내 쫓김,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 해골이 앙상한 아이들, 폐쇄된 작업장, 심장 곁을 까마귀 떼처럼 따라다니는 실업자들, 이 속에서 원주민은 매일 살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몇 파운드의 밀가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파농의 유작이 된 책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은 파농이 그토록 존경했던 프랑스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가 썼다. 사르트르 또한 서문에서 이렇게 적는다.
“원주민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매질을 당하고, 영양 부족과 질병,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은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늘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즉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나?
그들은 결국 가난했기에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파농은 “알제리 사람들은 구제불능이야”라고 선동했던 유럽의 백인들을 향해 ‘폭력 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요, 이성을 갖춘 신체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며,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수평폭력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수직폭력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제거하자는 뜻이었다.
안타깝게도 파농은 1961년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알제리의 독립을 불과 1년 앞두고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동지였던 사르트르는 파농의 유작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 장문의 서문을 남겼다. 그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제국주의자들은 5억 명에 이르는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불렀고, 나머지 15억 명을 ‘원주민’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은 그 15억 명의 수평폭력을 낄낄대고 조롱했다. 자신들은 뭔가 더 대단하고 우월한 인종인 척했다.
한국 현실과 많이 다른가? 민중들을 빈곤과 죽음으로 내 몬 뒤 지배자들은 위에서 내려 보면서 낄낄대고 조롱한다. 국민 정서가 미개하다고, 역시 개돼지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심지어 지배계급은 민중들의 편을 갈라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조장한다. 트럼프가 “국민들이 못 사는 건 멕시코 사람들 때문이야!”를 외치며 멕시코 국경에 성벽을 쌓겠다는 계획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것도, 그가 민중들의 수평폭력 성향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이라고 다른가? “너희들이 못 사는 건 외국인 노동자 때문이야” “남자들이 직장을 못 얻는 건 군대도 안 간 여자들이 설치기 때문이야” 이런 의식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넘쳐나나?
서울 강북경찰서에서 경찰이 피의자로부터 압수한 사제 총기를 공개하고 있다.ⓒ뉴시스
하지만 민중들이 못 사는 건 외국인 노동자 탓이 아니고, 남성들이 직장을 못 구하는 것은 여성들이 과거보다 조금 더 사회에 진출한 탓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계급이, 재벌들이, 소수 기득권층이 부와 권력을 몰아넣고 백성들에게 돌아올 몫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이 수직폭력의 구조를 먼저 해체하는 일이다. 사르트르는 파농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좋은 때다. 비제르타, 엘리자베스빌, 알제리 벽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마비 상태를 이용하자.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보편성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식칼이라도 충분하다!”
폭력투쟁을 지지하지 않기에 사르트르처럼 “식칼을 들자!”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배계급이 백성들의 삶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에 동의한다. “투쟁을 시작하자!”라는 그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바로 백성들을 죽음과 빈곤으로 내모는 수직폭력이다.
-[불금쇼에 대한 '반론'(!)] 진보와 트럼프는 결 달라
-사상 최장 철도 파업, 부디 야당이 나서 해결해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자존감을 높이는 법 (손수건 준비)
수습시절 군기가 굉장히 세다-군대에 준할 정도로 군기가 센 조직
첫날 울게 만들어, 일주일 한명 정도는 사표를 쓰게 그만큼 박살을 내는 것
새벽2시보고, 오전 6시보고-4군데 돌아-2시간밖에 자-두달정도
자살! 보고-뭘로죽어?-노끈! 색깔?-노란색! 길이?
당하면서도 궁금해-지시를 명확히 하지 않는 경우 많아
뭐하고 있어 역삼동으로 튀어 왜 튀어야 하는지를 안가르쳐 줘
얼마나 좌절하겠습니까!
불광동으로 튀어 그제서야 주섬주섬 물어보는 정도
5년후 궁금해서
가혹, 비인간적, 이상한 지시하고, 아이들 울리고,
좌절하게하고, 황당-미확인질문 계속 이어가는 궁금증 선배들에 물어봐
좋은 대학 나온 애들
실패를 해본적이 없는 애들-
쉽게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았다는 거죠.
이런 애들은 조직의 명령에 복종을 못한다
자기의 이성과 자기의 논리가 있기때문에
대학생으로선느 얼마나 성취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생활 시작랗때 얼마나 무능한 놈이고 너는 진짜 아무것도 아닌 놈이다라는
좌절을 가르쳐준다는 이야기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한꺼플 쉬프트시켜준다는 것
본인이 크나 큰 좌절을 겪으면서 사람이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해
명령이 떨어지면 무조건 해내야하는 직업인데
자기의 이성을 믿고 자기의 논리를 믿는 살사람이면
너무나 황당한 명령이어서 복종할 생각이 안들어
화성유치원 화재 참사 희생자에 슬퍼하는 부모들에 아이들 한자를 물어봐???
정상적 이성 가지면 못 물어봐 그런데 물어봐야 돼
명령 못따르면 죽는다라는 공포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는 것
쉽게 말하면 내가 아니고 나의 자존감을 다 포기하고
나를 버리고. 나는 오로지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로 재탄생을 해야만
뛰어난 직업인이 된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
모든 명령에 본인의 이성을 믿지 않고 잘 복종하는 사람을 키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니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거고요
자존감을 바닥에 밀어 넣는 것
그러면 사람이 고분고분해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런겁니다.
아이중에 한명이 너무 자존감이 없는 모습을 보여서
심리 상담 하시는 아는 분께 여쭤봤더니
아이에게 직접 자기를 그려보라는 거에요
그래서 너를 그려봐라 하엿더니
커다란 도화지에 구석에 조그맣게 자기를 그려놔
그 그림을 심리상담사에 말씀드렸더니
자존감이 확실히 낮다고 그러더라고요
자존감이 높은 애들은 그림을 그리면
얼굴을 화면 중앙에 크게 그리고 되게 예쁘게 그린대요.
어깨도 넓고 하트, 불꽃 너무 포장을 많이 한다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는거죠
반면 자신감이 없는 애들은 저 구석에 자그많게 그린다는 것
그래서 그 아이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EBS<내아이의 사생활> 프로그램 다운 받아 다 봐
자존감이 높은 애들과 자존감이 낮는 애들을 구분 지은 다음에
3~4살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하고 어머니들을 같은 방에 집어 넣어
그런 다음 퍼즐을 줘
그 퍼즐을 아이들에게 맞춰보라고 하는 실험시키고 관찰을 해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일관된 행동을 보여
아이가 어리니까 퍼즐을 잘 못맞추죠
그러면 백발백중 아이가 실수를 하는 순간 엄마가 가서 도와줍니다
이렇게 맞추면 되잖아
여기다가 끼워
엄마가 도와주는 거죠.
본인 스스로 성공한 경험이 잘 없는 아이들인 거에요.
그런데 자존감 높은 아이들의 엄마의 행동을 보면
아이들이 못 맞추고 있어도 가만히 두고 봅니다.
아이가 끼우고 끼우고 실패하고 실패하다가
끝끝내 맞춰나가는 경험을 아이 스스로 해나가게 부모가 지켜봐
그때 방송의 요지가 뭐냐면
사람의 자존감이라는 것은 언제 가장 높아지냐면
성공했을때 높아진다는 겁니다.
성공의 경험이 누적되었을 때
그런데 성공의 경험이라는게 쉬운 성굥의 경험을 누적했을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뭘 할때마다 우리 아이를 봐요
성공할때마다 자존감이 높아진대
계속 쉬운 과제만 주면 자기가 뭘 해도 성공을 하는 줄 아는 거죠
그러면 애가 정유라처럼 크는 겁니다.
언제나 자기는 하면 다 성공하는 줄 알고 정유라처럼 크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숱한 실패 끝에
정말로 어려운 고난을 딛고
내가 성공을 딱 해냈을 때
그 성취감이 그 아이의 자존감을 너무너무 높여준다는 거죠
그래서 아이가 계속 실패할 때 부모가 자꾸 도와주려하지 말고
지켜보라는 겁니다.
아이가 성공할 때까지요
그래서 그 아이가 실패를 해도 좌절하지 않고
끝끝내 언젠가 성공을 하면
그때 그 아이의 자존감이 한단계 높앚니다고 방송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 드는 생각들이; 그런 것
인류문명의 7000년 역사 같은 걸 살펴보면
역사가 진보를 할 때 보면 -민중들이 자존감이 높을 때 분명히 진보를 합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가 퇴보를 할 때 보면 민중들의 자존감이 현저하게 떨어졌을 때는 반드시 퇴보했던거 같아요
그러니까 고대ㅔ 노예제 사회에
집주인 10명밖에 안되는데 노예300명이지 않습니까!
노예 300명이 마음만 먹으면 집주인들 쫓아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노예들은 인류로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이 없었던 거죠
우리는 태어나서 평생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야
우리의 삶은 이런거야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고 ... 한 번도 성공해 본 경험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고대 노예제에서는 달아나가다 잡힌 사람들한테
사실은 고대 집주인 중에서도 착한 사람이 한명 정도는 있을 거 같잖아요
그런데 예외없이 노예가 도망치다 잡혀오면 처참한 형벌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단 한번의 성공도 용납하지 않는 거에요
왜냐하면 한번이라도 성공하면 사람들이
어라 성공했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에 기대를 갖게 되고 성취감에 대해서 꿈을 갖기때문에
그런 반란의 시도는 처참하게 짓밟습니다.
그래서 절망의 경험을 계속해서 누적시키죠
그러다보면 노예들 마음속에 우리는 뭘해도 성공하지 못할거야
우리는 이렇게 사는게 운명일거야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배계급들이 민중들에게 자존감을 끝까지 떨어뜨리고
절망을 너무 당연한 걸로 생각하게 되면
인류 역사는 계속 퇴보했던거 같아요.
반명에 프랑스 대혁명때나 사회주의 혁명때나
어쨌든 사회가 한걸음씩 진보를 할 때 보면
민중들은 성공의 경험들을 누적해나가면서
우리는 할 수 있어라는 성취감을 가지고 확대를 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짧은 생각에는
절망을 누적시키려는 지배계급의 의도가 통하는냐?
아니면 성취의 기쁨을 쟁취해나가는 민중들의 요구가 성공을 하느냐?
이 싸움에 따라서 인류 역사가 진보, 퇴보를 반복한 듯
마틴 셀리그만 미국 심리학자 이런 실험을 한 적 있어
개 3마리를 방 3개에 따로 가두어 놓아
그리고 첫번째 방(방A)에 있는 개하고 두번째 방(방B)에 있는 개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겁니다. 고통을 주는 거죠.
세번째 방(방C)은 그냥 내버려둡니다.
방A에는 -버튼 하나 있어 누르면 전기충격 멈춰져 물론 개한테 설명을 해줄 수는 없는거죠
그렇게만 장치를 해놓습니다.
방B에는 전기충격을 주는 데 아무런 층격을 멈출 장치 해놓지 않아
방C에는 아무 것도 안해-여기 개는 상팔자 니나노하고 있는 거죠.
방A와 방B에 전기충격을 계속 주면
처음엔 두방의 개들이 놀라서 충격을 벗어나려 발버둥 쳐 너무 고통스러우니까요
방A의 개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시간은 걸리지만 코나 발로 버튼을 누르면
충격이 멈주어진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달아요
또 한번 전기층격을 주면 다음에는 그 버튼을 찾아가서 누릅니다.
충격이 멈추어진다는 방법을 알게되는 것
그런데 방B의 개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돼-
어떻게 해도 이 방에 있는 개는 충격에서 벗어 날 길이 없어를 학습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방의 구조를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똑같이 새로운 실험을 한번 더해
각 방에 옆방을 만들어줘
그리고 방A에[ 있는 는 버튼은 없애버리고요
그리고 방3개에 똑같이 모두 전기 충격을 가하기 시작해
그러면 똑같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 이번에는 방C에 있는 개도 똑같이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을 주면
방A에 있었던 개는 어떻게 하는냐면
처음에는 버튼을 찾는 겁니다. 옛날에는 분명히 버튼을 누르면 고통이 멈춰져
버튼을 막 찾다가 못찾게 되죠.
그러면 헤매대가 시간를 오래두고 보면 마침내 옆방으로 넘어갑니다.
이 개는 과거에 내가 버튼을 누르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경험을 했기때문에
똑같은 전기충격이 와도 내가 방법은 있을거야, 길이 있을거야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이 고통을 멈출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이 학습이 된거에요.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를 하다가
마침내 옆방으로 넘어가면 고통이 멈줘진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방C에 있던 개는 난생 처음으로 전기충격을 당해보는 거잖아요
이 개는 처음에 놀래가지고 막 발버둥을 치죠
고통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가 방A에 있던 개보다는 훨씬 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시간이 오래걸리는데 결국은 옆방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멈추는 길을 찾아내요
그런데 제일 특이한 점은 고통이 학습된 B에 있었던 개입니다.
이 개는 고통을 딱 가하는 순간 그냥 헉하고 주저 앉아 버립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요
그냥 아파합니다.
왜냐하면 이 개는 이미 내가 무슨 노력을 해도
고통이 멈춰지지 않는 다는 경험이 학습되어버렸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옆방으로 넘어갈 생각도 고통을 멈출 생각도 못하는 거죠
이걸 마틴 셀리그만은 '학습화된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방A에 있던 개한테는 희망을 학습시키는 거고요
방B에 있던 개한테는 무기력을 학습시킨 겁니다.
방C에 있던 개는 무식한거죠, 무지한거죠
이렇게 놓고 실험을 해보면
확실히 우리가 알수 있는게 있습니다.
희망이 학습된 개는 어떤 고통이 있어도 이걸 고통이 오면 극복할 수 있을거야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과거에 성공한 경험이 있거든요
성취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희망을 놓지않고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움직이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방B에 있던 개나 방C에 있던 개를 보면
차라리 절망보다는 안될거야라고 포기를 하기보다는
아예 무식한게 더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예 무식하면 차라리 새로 배울수가 있어요
새로 배우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서 옆방을 향해서
뛰어나가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건 안될거야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야 진짜 다해봤잖아 안되던데 뭐.
세상이 바뀌겠어! 이런 절망이 누적되면
어떤 고통이 더 가중된 고통이 와도
순응하고 복종하고 이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셀리그만의 학습화된 무기력이라는 실험의 결론이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연대합시다. 작은 승리를 위해 싸웁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휴~좋은 세상이 올까요!
안될거 같은데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되게 많이 봐요.
제가 그때마다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큰 승리가 중요한게 아니고요.
작은 승리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늘 그러거든요
계속해도 실패하게 만드는 겁니다. 계속해서 실패하게 만들어서
실패가 당연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싶어해요
고대 노예들처럼요.
그러면 쉽게 복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좌절이 내면화되면
영원히 복종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의 성취감이라는 것은 자존감이라는 것은
언제 높아지냐면
성공할 때 높아지지만 그건 그냥 성공이 아니고
숱한 실패를 딛고 여러 차례 실패를 했는데
정말로 안될 것 같은 일을 딱 해냈을 때 우리의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배계급이 우리한테
니네들은 어떻게 해서도 안돼
너희들한테는 단 하나의 작은 승리도 허용해주지 않아
정말로 우리를 지치게하고 정말로 파렴치하게 하고
우리한테 정말로 좌절을 안겨주더라도
포기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럴수록에...
우리들한테 99번 실패를 계속 경험하게 해주어도
끈질기게 붙어서 희망을 찾아나가서
한번만 작은 승리를 경험하면
방A에 있는 개가 되면
버튼을 누르면 고통이 멈춘다는 경험을 하게되면
또 다른 고통이 와도 희망을 찾게되는 승리의 누적,
자존감의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넘버3에서 송강호씨가 얘기한 무대포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소뿔 딱 잡고
안부러질거 같지만 전세계를 돌면서
맞짱을 뜬 최영의 선생처럼
너 누구냐? 나 최영의다
소뿔 딱 잡고 좆나게 가라데로 내치는 겁니다.빠개질때까지...
99번 내리쳤는데 안빠개진다고 포기를 하면
영원히 소뿔은 빠개지지 않아요
진짜 빠개질때까지 내리치면 한번 딱 빠개지는 순간
소뿔뿐만 아니라 다른 그 어떤 소뿔도 뿌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거죠.
수많은 실패를 맛보았었는데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해시태그를 통해서 불씨를 살려놨어요
이건 부당해 라며 작은 싸움을 시작해나간겁니다.
작은 불씨를 죽이지 않겠다는 수많은 불씨들이 연대를 해서
개헌을 이야기하던 대통령이 사과를 하는 지경까지...
너무 큰 성취감을 얻게된 거죠.
한국사회가 저 오만방자한
저 패악무도한 대통령 독재자를 카메라화면앞에서
머리를 숙이게 만든 겁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어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만들었다 생각해요
어떤 포악한 독재자들이 어떤 간악한 짓을 하면서
민중들의 시야를 흐뜨러뜨리려 해도
소뿔 딱 잡고 빠개질때까지 가라데로 내치면
언젠가는 부러뜨릴 수 있다라는 희망을...
방A에 살고 있는 개의 소중한 성취의 경험을 안겨주었다 생각해요
앞으로는 이 경험을 이 성취감을 가지고 있으면
실패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실패끝에 얻어낸 성취이지 않습니까.
독재자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것
정말로 우리 사회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내는데
엄청난 밑거름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졌고
박근혜의 사과에 굉장히 기뻤어요
이걸 계기로 국민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더 싸워야되겠다는 희망들이 잘 장착괴었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라는게
하면 만들어질 수 있는 겁니다.
더 한걸음 나아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보잘것 없던 우리가 존귀해지는 것 같아
-데스크의 위력, 최순실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박근혜와 어떤 종류의 협상이나 거래도 해서 안 되는 이유
-정치가 민의를 왜곡할 때 시민의 자치가 세상을 바꾼다.
-대학 교수들의 잇따른 시국 선언, 참된 지식인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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