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30. 16:5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참된 지혜는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걸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저 미물, 고대 박테리아 고세균 암모나이트부터 오늘날의 고래 강아지 토끼풀 장미꽃 나비까지, 모두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나와 똑같은 존재구나! 하는 데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일체 만물이 나와 똑같은 마음(一心)을 가지고 있는 것! 따라서 비록 형상과 가진 몸에 따라 표현을 할 수 없고 표현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똑같이 존엄하고 똑같이 존경 받고 똑같이 대우받아야할, 거룩하고 고귀한 무한 생명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잘 것 없는 미물 하나라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고기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눈만 껌벅이며 주인을 따르는 저 순박한 소 돼지들, 비록 좁은 물속이지만 힘차게 돌아다니는 물고기를 회를 뜨고 그 살을 씹을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살고 싶고, 모두가 나와 똑같이 행복하고 싶어하는,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존재임을 알기에 그들을 죽이고 죽은 그들의 고기를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동물, 식물이 어찌 인간과 같으냐고.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죽는 건 그들의 운명이 아니냐고.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철저한 착각이며 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을 실지로는 조금도 알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저는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은 오직 겉모습, 그리고 생명체의 구조일 뿐,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편안하고 싶은 것은 조금도 나와 다름이 없습니다. 모두가 번성하고 모두가 오래오래 잘나고 행복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세상에 나왔을 뿐, 모습이 다르고 생명체의 구조가 다르다고 죽임을 당하고 그 고기와 가죽이 나를 위해 쓰이는 게 당연하다고 우리가 생각해도 좋을 만큼 당연하게 나온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건 오직 내 욕심, 내 입장만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나온 소리일 뿐, 그들의 주장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을 아는 데서부터, 일체 존재에 대한 공경심과 찬탄, 슬픔이 싹틉니다. 아! 무지랭이같은 저 어린 강아지, 토끼, 무당벌레, 장미꽃 하나도 모두 나와 다른 게 하나도 없구나! 나와 똑같이 잘나고 싶고 많이 가지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어하는구나! 다만 태어난 한계 때문에 그렇지 못하고 살다 갈 뿐, 근본적 마음에서는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미안하다, 나만 잘나서...이런 마음은 무엇을 배워서 아는 마음이 아니라, 진리에 눈뜰 때 누구나 가지게 되는 우리 본래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사람들을 볼 때도 일어납니다. 특히 나보다 지위도 낮고 어려운 분을 볼 때,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입니다. 나와 똑같은 무한 욕심, 무한 영광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여러 환경 조건이 나와 같지 못해 잘나고 행복할 기회를 잃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 물론 나보다 잘난 분들이 훨씬 더 많지만, 그래서 비록 자랑할 잘남은 티끌도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행복이 부담스럽고 미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을 잘 모셔야겠다, 저 이들을 행복하게 해 드려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대립과 갈등을 없애며, 분한 마음을 소멸하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善), 모든 복(福)은, 이렇게 모든 존재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구나, 하는 걸 알면서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가, 무한한 소망과 무한한 복을 원하는, 모두가 다르지 않는 똑같은 마음(一心)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나면 남을 속일 수도, 남에게 상처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행복을 갈구하듯 다른 이도 똑같이 그러하고, 내가 상처 받으면 힘들기에 남에게 상처를 도저히 줄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아픔을 내가 대신 받고 싶고, 내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만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모든 선, 모든 복, 모든 지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똑같음은 미물을 볼 때, 혹은 못난 분을 볼 때만 아니라 잘난 분을 볼 때, 심지어 신, 불보살을 볼 때도 일어납니다. 저 잘난 분들, 그리고 장엄한 신, 불보살이 나와 조금도 다른 존재가 아니구나! 나와 똑같은 분이었구나 하는 걸을 알 때, 나를 옥죄이던 열등감, 패배감, 좌절감은 사라지고 무한한 자부심, 희망이 솟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이 아니라, 모두를 섬기고 공경하겠다는 우리의 무한 맹세의 시작입니다. 무한 중생을 무한으로 섬기겠다는 맹세! 그 맹세가 다시 일체의 선을 낳고 일체의 지혜를 이룹니다.
*덧글
1.불교의 최고점의 가르침이 <불보살이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불교는 비록 부처와 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나 그 분들이 본질적으로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불보살은 저 멀리 저 위에 두고 나는 납짝 엎드려 불보살은 잘난 이, 나는 못난 이로 생각한다면 백날을 불교해봐야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2.기독교도 사실 이렇게 되야 하는데, 기독교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나누는 이분법이 너무 고착화되어 이런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저 거룩한 예수님이 나와 똑같다, 못난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분이다! >라고 아는 데서 무한 창조가 일어나는데, <예수는 거룩한 분, 나는 비천한 이>, 또는 <예수는 창조주의 아들, 나는 피조물의 자식>이라 여기며 구원과 영원을 밖에서 구하고 밖을 의존하는 한, 신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봅니다. 테레사수녀가 오지 않는 신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도 이런 연유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신이요, 이천년 전의 예수와 마리아와 21세기 지금 이 자리의 내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셨다면, 오지 않는 신을 그렇게 평생 기다리지는 않으셨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3.<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부처님이 성도하실 때 아신 사실이기도 합니다. 즉, 일체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은, 어찌 보면 깨침과 동격인 가르침도 되는 것입니다(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은, 일체 만물에서 불성을 본다는 말).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공경하고 찬탄하고 섬기는 삶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비록 깨치지 못해고 공경하고 찬탄하고 섬기는 삶을 사면 <깨침이 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因)을 이루어 과(果)를 얻는 방법도 있지만, 과를 먼저 이루어 인을 오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공경, 찬탄, 섬김을 불교에서는 <보현행원>이라 부르며, 보현행원을 하면 깨침이 온다는 것은 보현행원이 바로 깨달음(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몰라도 보현행원을 하면 자연이 세상이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서서히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재의 구도행 마지막이 보현보살을 만다는 것이며, 그렇게 만난 보현보살에서 선재는 그토록 찾았던 모든 스승님들이 자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분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게 되는 것으로 기존 화엄경(60,80화엄)은 끝나며, 나중에 나온 40화엄경에서는 이 사실을 모두 모아 드디어 <보현행원품>으로 화엄의 대미를 장식하게 됩니다.
4.나와 다름이 없음을 본다는 것은, 또한 나의 현 모습, 과거 모습, 미래 모습이 조금도 차별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늙거나 어리거나 나의 본모습은 언제나 똑같은 것.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었을 때나 우리 본모습은 언제나 항상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시 일체 중생이 차별이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장애가 있거나 있지 않거나, 잘나거나 잘나지 않는 일체 중생이 모두 동격이란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관, 인생관엔 나타나는 현상과 상관없이 언제나 찬란한 무한 영광만 있게 됩니다.
가을까지 온 것들 / 도종환
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맛비의 회초리를 다 견뎌냈습니다.
뜨거운 햇살의 시간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뚜라미 몇 마리가 언제 숨어들어 왔는지
욕실 구석에 살림을 차린 뒤
몰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뻗어 소리를 내 보낼 방향을 가늠하더니
저녁이면 숲으로 긴 편지를 찍어 보내느라 골똘합니다.
귀뚜라미 가족도 천둥과 번개의 시절을 다 지나왔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새끼들을 보듬어 안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당가의 물봉선, 원추리, 배롱나무, 청죽, 질경이도
쏟아지는 빗줄기를 다 이겨냈습니다.
번개가 날카로운 칼날로 팽나무 가지 끝에서
뿌리까지 훑고 지나갈 때,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들도 꽃부터 뿌리까지 찢어질 듯
뜨거운 불칼을 맞으며 견뎌냈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뿌리로 땅을 움켜잡고
질렀던 소리 없는 비명을 가을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뿌리가 견딜 때 열매들도 똑같이 견뎠습니다.
대추나무의 작은 대추알들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대추나무 가지와 대추알을 연결하는 꼭지는
가늘고 짧고 작습니다.
폭풍이 온몸을 흔들어 댈 때마다 대추알을 지키느라
꼭지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대추보다 몸이 큰 푸른 감과 둥근 사과와 배는 제가 키워온
제 무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시간을 지나 지금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꽃과 나무와 곤충들이 대견합니다.
한 알의 과일은 그냥 저절로 자란 과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 지금 완성을 향해
과육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송이 가을꽃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청초한 빛깔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폭풍과 장맛비와 폭염속에서 올린 절절한 기도가
우리가 마시는 맑은 공기속에 신선하고 뜨거운 기운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 도종환 시인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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