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①막스 프랑크 박사와 그의 업적|****@불교와자연과학@

2020. 2. 8. 11:13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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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스 프랑크 박사와 그의 업적

 

과학시대라고 말하는 오늘날 석가세존이 만물만상의 근원을 공(空)이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과학적 입장에서 어떠한 것인가를 수량적으로 표시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납득시키지 못한다. 

추리에 의하여 만물만상의 근원을 공이라 하고, 이와 같은 본성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이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무리한 일이다. 석가세존의 가르침이 아직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미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독일의 물리학자로 유명한 막스 프랑크가 19세기의 마지막인 1900년 12월 14일에 발견한 프랑크 상수 h가 바로 석가세존이 만물만상의 근원이라고 지각한 공(空)의 한 극미입자(極微粒子)를 수량적으로 표시한 것으로서 여기에서 공이 이른바 과학적으로 만물만상의 근원임이 실증된 것이다. 

막스 프랑크는 석가세존이 지각한 공을 실증하여 불교를 현대에서 살리는 중대한 역할을 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사람됨을 알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막스 프랑크는 오늘의 서부 독일 서북북인 당시의 프로시아 키엘(kiel) 시(市)의 명문가 유리스 빌헬름 폰 프랑크(Wilhelm von. Planck)의 아들로 1858년에 태어났다. 막스 프랑크의 본명은 명가에 어울리게 막스 칼 에른스트 루드빅 프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로 극히 길다. 그러나 프랑크가(家)의 막스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프랑크의 집안에는 유명한 법률가, 관리, 학자가 대대로 나왔으며 막스의 증조부 곳드리프 야곱 프랑크는 신학자로서 알려졌고, 조부와 아버지는 법률학의 권위자였다. 막스 프랑크가 물리학자로서의 공적을 올리면서도 이른바 종교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이러한 가문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는 72세 때에 『과학과 신앙』, 77세 때에 『종교와 과학』이라는 책을 냈다. 그의 생각은 「과학은 물질의 사리(事理)뿐만 아니라, 인류의 도덕적, 정신적 발전에도 기여한다」는 입장이다. 

막스가 탄생한 시대는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이어진 혼란으로 경제적 불안이 있었으며, 프로시아에서는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책이 내세워졌었다. 막스가 12세 때에 프로시아의 산지인 알사스와 로렌의 두 개 주를 빼앗고, 그 이듬해인 1871년에는 독일제국이 성립되었다. 

그 무렵 프랑크 일가는 키엘에서 뮌헨으로 이사하여 막스는 맥시밀리안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막스는 헬만 뮤라라는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과학에 뜻을 두게 되었으며 특히 에너지 항존(恒存)의 법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나지움(Gymnasium 고등학교)을 거쳐 17세 때에 뮌헨대학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공부하고 20세에 졸업하였으나 계속하여 대학에 남아, 신역학 체계(新力學體系)로 유명한 키르히호프(G. R. Kirchhoff) 자유에너지의 개념을 수립한 헬름 홀쯔(H. von Helm Holtz) 밑에서 1년간 면학하였다. 이 때에 클라우시우스(R. Clausius)의 열역학(熱力學) 논문에 흥미를 가져 열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켜 1879년에 『열역학의 제 2법칙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뮌헨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에 뮌헨대학의 무급 강사(無給講師)가 되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1885년에 프로시아의 성장(省長)인 아돌프라는 사람에게 인정받아 출생한 고향의 키엘대학 교수가 되었다. 

프랑크가는 명문가로서 유복하였기 때문에 막스는 이 때까지 보수도 없이 학문을 계속해 왔으나 키엘대학의 교수가 되면서부터 자활할 수 있게 되어 29세 때에 뮌헨의 은행가의 딸, 마리 멜크와 결혼하였다. 이 무렵 막스의 마음은 에너지(energy)란 무엇인가에 끌려 있었으며, 1884년에는 괴팅겐 대학이 낸 『에너지라는 말과 그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라는 현상논문에 응모하였다. 

막스는 마리오 krudghs하여 일가를 이루면서 키엘대학에 근무, 열역학의 연구를 계속하였으나 1889년에는 베를린대학에 초빙되어 1892년에 정교수(正敎授)가 되었고, 그 후 계속하여 70세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막스의 부인 마리는 1909년에 사망하여 그는 마리의 질녀인 마루가 폰 호에스트리와 재혼하였다.

막스 프랑크가 베를린대학의 교수가 된 무렵, 독일은 군비(軍備)의 충실을 위하여 철강의 생산증강에 주력하고 있었다. 열을 사용하는 철강생산에 있어서 열복사(熱輻射)에 의한 온도측정방법이 문제가 되어 있었다. 이 열복사에 의한 기초연구로서 흑체복사(黑體輻射)에 있어서의 전자기파의 진동수 ν와 에너지 분포와의 관계를 구하고 있는 동안에, 진동수ν(그음)의 전자기파가 취할 수 있는 에너지 En(일)의 값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고, En=nhν의 식으로써 표시되듯이 띄엄띄엄한 값을 취한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더욱이 이 식(式)에 있어서 n은 1,2,3,......n으로 표시되는 정수이다. 뒤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식에 있어서의 h가 프랑크상수로서 만물만상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 입자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이 발견되어 독일의 물리학 연보에 발표된 것이 1900년 12월 14일이었다. 

1913년 10월 15일에 프랑크는 베를린대학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이듬해에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1918년 11월 1일 독일의 패배로 끝났으나, 이 전쟁중인 6월 2일에 프랑크는 열복사의 이론적 업적으로 1918년도의 노벨 물리학상을 스톡홀름의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서 받았다.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은 패전에 의한 혼란기였으나 프랑크는 파괴된 조국의 학술에 의한 재건에 노력해 온 프랑크는 1911년에 설립된 카이자 빌헬름 과학 기술진흥회(Kaiser Wilhelm Society for Scientific Reseach)의 총재로 1930년에 취임하였다. 

독일이 국력을 회복함과 동시에 히틀러(A. Hitler) 정권이 확립된다. 그러나 프랑크는 히틀러의 국수운동(國粹運動)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제 2차 대전은 프랑크를 불행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프랑크는 1947년 10월 4일 89세의 생애를 마쳤다. 

오늘날 프랑크의 학문적 업적은 훌륭하게 인정되어 독일 과학기술진흥회는 본래의 카이자. 빌헬름(Kaiser Wilhelm)의 이름을 막스 프랑크로 바꾸어 그의 명성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만물만상의 근원인 프랑크 상수 h의 발견이야말로 프랑크 박사의 이름을 영원히 인류의 마음에 새겨놓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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